[한경에세이] 우리 시대의 영웅

김학용 < 자유한국당 의원 ansung1365@hanmail.net >
왼손잡이는 대체로 할머니의 영향이 크다. 내 경우에도 어릴 적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면 부모님은 야단을 치셨지만 할머니는 “어느 손이든 밥만 잘 먹으면 된다”고 감싸셨다.

어느 날은 할머니가 나를 방으로 불러서는 입을 벌려보라고 했다. 숟가락을 내 입에 쑥 넣어줬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꿀이었다. 할머니는 “동생들이 물어보면 약이라고 얘기하라”고 하고는 틈날 때마다 나를 불러 꿀 한 통을 다 먹이셨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살색 법랑 단지 바닥에 남은 설탕 덩어리로 볼 때 아마 가짜 꿀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먹거리조차 부족했던 시절이라 그 꿀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맛이었고 할머니의 따스한 사랑 그 자체였다.어른이 돼 할머니께 용돈도 드리곤 했지만, 할머니는 당신을 위한 일에는 단돈 1원 한 장 쓰는 일이 없었다. 동네 중국음식점에서 드시고 싶은 음식을 장부에 달아놓고 마음껏 드시라고 했지만 단 한 번도 드신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방을 정리하다 찾은 현금만 당시 돈으로도 수백만원이 넘었다. 자식, 손주들에게 받은 용돈을 한 푼도 안 쓰고 고스란히 모았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30대에 홀로 된 할머니는 시골에서 땔감 나무를 장에 내다 팔아 아들 둘을 키웠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지만 외상 내역, 금전 거래와 관해 날짜는 물론 금액까지 빠짐없이 외우셨다. 그런 강인함과 절약정신으로 한평생 자식을 키우고 집안을 일으킨 것이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겨울철 빙판길에 넘어지면서 뇌진탕 증세를 보였다. 나는 용하다는 한의원을 수소문해 약 한 제를 지었다. 주말에 고향에 내려가 전해드리려 했지만 그만 갑작스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토록 손자를 신뢰하고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신 할머니를 생전에 더 잘 모시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배고팠던 시절, 할머니는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며 자식들 잘되기만 바라는 마음으로 집안을 돌보셨다. 그런 할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 집안과 가족이 있을 수 있었다. 나아가 이 땅의 모든 할머니 덕분에 식민지배와 전쟁의 상흔을 이겨내고 오늘날 풍요로운 한국을 만들 수 있었다고 본다. 평생 헌신하며 살아온 우리 할머니들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전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기적의 역사를 만든 우리 시대의 영웅들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