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보다 돈 앞세운 트럼프…美 '세계의 경찰' 포기

세계 질서가 바뀐다
(1) 고립주의로 되돌아간 미국

'팍스 아메리카나' 흔들린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다. 이전에는 고립주의와 불개입 원칙을 채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먼저 공격하지 않았으면 미국은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1945년 이후엔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각종 국지전과 테러 등을 막기 위해 세계 곳곳에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미국 주도의 이 같은 세계 질서가 바뀌고 있다. 그 선봉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동맹보다 돈과 미국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따진다.
시리아 철군은 트럼프 대통령의 고립주의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례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일 시리아 철군 방침을 밝힌 지 이틀 만에 터키가 미국의 대(對)테러전 전우였던 쿠르드족을 침공하면서 전 세계와 미국 내에서 비판 여론이 빗발쳤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철군을 강행했다. 그러면서 시리아 철군은 2016년 대선 공약이었다고 상기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간) 백악관 성명에서도 “미군의 과제는 세계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고 못 박았다.

워싱턴포스트(WP) 부편집인인 보브 우드워드는 지난해 저서 <공포>에서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아젠다로 반이민, 제조업 일자리 늘리기와 함께 ‘무의미한 전쟁에서 빠져나오기’를 꼽았다.

미국이 18년간 전쟁을 벌여온 아프가니스탄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철군을 준비하는 것, 호르무즈해협에서 유조선 보호 부담을 동맹국과 분담하려는 시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럽 회원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 등도 같은 맥락이다.한국도 ‘트럼프식 고립주의’의 직접적 영향을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1차 미·북 정상회담을 한 뒤 전격적으로 한·미 훈련 축소 방침을 발표했다. 훈련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게 직접적 이유였다.

미국은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도 대폭 늘릴 것을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한국을 겨냥해 “안보열차에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올해 한국의 분담비용은 1조389억원인데, 미국은 이를 50억달러(약 6조원)까지 늘려야 한다고 압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등 한·일 갈등을 미국이 적극적으로 중재하지 않는 것도 고립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이전 미 행정부에선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트럼프식 고립주의’는 미국 경제력의 상대적 쇠퇴, 셰일혁명으로 중동산 원유 의존도 하락, 냉전체제 해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자유무역과 세계화의 결과 미국 저소득층이 피해를 봤다는 인식이 커졌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식 고립주의는 중국이 부상하고, 러시아가 영향력을 확대하며 ‘강대국 간 경쟁’이 재연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국익에 해가 될지도 모른다. 당장 시리아 철군 이후 미국의 빈자리를 러시아가 메우면서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김이 세졌다. 이와 관련, 공화당 원내 사령탑인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는 18일 WP 기고를 통해 “시리아에서의 미군 철수는 심각한 전략적 실수”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AP통신은 “미국 우선주의가 실제로는 ‘미국 홀로’를 의미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고 꼬집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도 이날 칼럼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시리아 철군이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대통령)의 승리, 쿠르드족의 패배, 미국의 동맹에 대한 많은 불확실성으로 귀결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저명한 국제관계학자인 마이클 만델바움을 인용, “독일과 일본이 미국의 안전보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면 그들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한반도 주변에서도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할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7월 한·일 갈등이 본격화하는데도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자 폭격기를 동원해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카디즈)을 침범했다. 한·미·일 공조의 빈틈을 파고든 것이다. 러시아는 이달 22일에도 6대의 군용기로 카디즈를 침범했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이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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