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저물가 동시에…더 커진 D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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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기대인플레이션율 1.7%
2002년 통계작성 이후 최저
실제 물가는 이미 마이너스를 이어가고 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8월(-0.04%) 역대 처음 마이너스로 반전했고 지난달(-0.45%)에도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10월도 마이너스 물가가 유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물가가 계속 떨어지자 앞으로 더 하락할 것으로 예상하는 소비자들이 소비를 늦추고 물가는 더 떨어지는 이른바 ‘자기실현적’ 저물가로 이어지는 양상이다.
전례 없는 저성장·저물가가 동시에 나타나면서 전문가들 사이에 “이제 정부가 디플레이션을 부정만 하지 말고 발생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물가 하락→경제심리 악화→소비·투자 지연…더 커진 불황 '경고음'
10월 기대인플레율 '역대 최저'
함준호 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은 “마이너스 물가도 심각하지만 기대인플레이션이 계속 떨어지는 건 특히 우려스럽다”며 “계속 이런 기조가 지속되면 경제 자신감을 위축시키고 소비와 투자를 지연시킨다”고 말했다.소비 위축 징후 뚜렷한데…
그럼에도 정부는 저물가 원인을 공급 측면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이달 초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8, 9월 마이너스 물가는 지난해 같은 기간 물가가 높았던 데 따른 기저효과”라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에는 폭염 등으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했는데 올여름에는 반대로 온화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농산물 물가가 떨어졌다는 설명이다. 국제 유가도 지난해 8, 9월보다 가격이 낮아 마이너스 물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최근 물가 흐름은 이 같은 정부의 설명만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여름 날씨 변화 탓으로 보기 어렵다. 물가는 이미 올해 1월부터 0%대를 이어가는 등 이상 징후를 나타냈다. 국제 유가와 농산물 가격 등을 제외한 근원물가(식료품 및 에너지 제외 물가상승률)도 올 들어 크게 둔화됐다. 9월 상승률은 1999년 외환위기 당시를 제외하면 역대 가장 낮은 0.5%에 그쳤다.복지 확대 등으로 공공물가(관리물가)가 낮아진 영향이라는 정부 주장도 사실상 오판에 가깝다. 한은에 따르면 ‘관리물가 제외 근원물가’도 올 들어 바닥을 이어가고 있다. 1분기 1.5%였던 관리물가 제외 근원물가는 2분기에 역대 최저 수준인 1.2%로 떨어졌고, 3분기에도 1.3%에 그쳤다. 공급 측면의 영향이 아니라 소비 위축에 따른 물가 하락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불황 가능성 본격 대비해야
소비자 심리 위축은 장기화될 조짐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10월 소비자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이달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98.6을 나타냈다. 이 지수가 100보다 크면 경기를 낙관적으로 보는 소비자가 더 많고, 100을 밑돌면 비관적 전망을 하는 소비자가 많다는 뜻이다. CCSI는 이달까지 6개월째 100을 밑돌고 있다. 유럽발 재정위기가 한창이던 2012년 이후 최장기간이다. 올해 전체로 봐도 4월(101.6)에만 100을 소폭 웃돌았을 뿐 나머지 기간은 줄곧 100을 밑돌았다.김성태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정부 주장대로) 소비자물가가 조만간 플러스로 돌아선다고 하더라도 디플레 우려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며 “경각심을 가지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경봉/서민준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