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반정부 시위에 하리리 총리 사임 발표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가 29일(현지시간) 총리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하리리 총리는 이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막다른 길에 갇혔다”며 “대통령에게 사퇴서를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레바논에서는 지난 17일부터 실업난 해결, 부패 청산 등 개혁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하리리 총리는 21일 공무원 봉급 삭감, 은행에 대한 자금 지원 등 개혁 방안을 내놨지만 아직 이행하지는 않으면서 시위가 점점 확산하고 있다.하리리 총리의 사퇴로 레바논 정세는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될 전망이다. 레바논의 대표적인 재벌인 그는 2009∼2011년 총리를 역임한 뒤 2016년 12월 다시 총리로 선출됐다. 하리리 총리는 수니파와 마론파 기독교, 무당파가 연대한 정파인 ‘미래운동’의 수장이다. 친이란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와 연정을 구성했다.

미래운동과 헤즈볼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등과의 관계를 놓고 종종 충돌을 빚었다. 하리리 총리는 사우디 태생으로, 사우디 시민권을 보유했고 사업 기반도 사우디다. 그만큼 사우디와 밀접하지만 시리아의 개입에는 반대한다. 헤즈볼라는 이란 혁명수비대의 지원으로 시리아 내전 초기부터 병력을 보내 시리아 정부를 지지했다.

하리리 총리는 2017년 11월에는 이란, 헤즈볼라 세력에 살해 위협을 당했다면서 사우디에서 돌연 총리 사퇴를 발표했다가 번복했다. 이란은 미국과 사우디가 하리리 총리를 사우디에서 ‘인질’로 잡고 중동의 긴장을 고조하고 레바논에 개입하려고 사퇴 공작을 꾸몄다고 강하게 반박했다.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는 이날 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이 반정부 시위대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로이터통신은 헤즈볼라, 아말 지지자들이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의 이름을 연호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시위 초기 동요 ‘아기 상어’를 합창하고 음악에 맞춰 춤추면서 축제 분위기에서 진행된 반정부 시위는 친정부 세력과 충돌, 도로를 막은 연좌 농성에 대한 정부의 진압이 시작되면서 과격화하고 있다.

종파, 종족이 뒤섞인 레바논의 통치 체계는 세력 간 균형을 예민하게 고려한 권력 안배주의를 원칙으로 해 ‘하이브리드 정권’이라고 별칭이 붙을 만큼 독특하다.

4년 만에 한 번씩 직접 선거로 의회가 구성되고, 의회는 6년 단임의 대통령을 선출한다. 대통령과 연정을 통해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정파는 협의를 통해 실권자인 총리를 임명한다. 종파간 세력 균형을 위해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의회 의장은 이슬람 시아파 출신이 각각 맡는다.명목상 대통령제이지만 실권은 총리가 쥐는 내각제에 가깝다. 정부 구성권을 보유한 의회는 기독교(마론파, 아르메니아 정교,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이 절반씩 차지한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