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 해병대원의 '진짜 전쟁'

유진 슬레지의 '태평양전쟁' 출간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유사 이래로 전쟁을 이끈 국가 지도자의 훌륭한 기록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온몸이 갈가리 찢겨 죽어 나간 동료의 시신을 뒤로하고 총탄이 빗발치는 고지를 기어 올라 적군과 온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사병이 문학적으로, 또 역사적 자료로도 의미 있는 참전기를 남긴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런 점에서 미 해병대원으로 태평양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펠렐리우와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던 유진 슬레지의 '태평양 전쟁(With the Old Breed)'은 값진 기록이다.

우선 시신이 해변과 들판과 숲을 메웠던 두 전투에서 모두 살아남는 것 자체가 만만찮은 확률이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병사가 제대 후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할 정도의 지적 능력과 읽는 이의 마음을 휘감을 만한 문장력까지 갖췄다.

무엇보다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의 와중에도 성경책의 여백에 자신이 보고 경험한 '진짜 전쟁'을 꼼꼼히 메모한 기록의 인간이었다.
만 20세가 된 1943년 겨울 샌디에이고의 해병대 훈련소에 입소한 슬레이지는 혹시라도 바다 건너 전투 현장에 투입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 버릴까 봐 조바심이 나 있던 열혈 청년이었다. 그의 이런 패기는 훈련을 마치고 제1해병사단 소속으로 첫 전투 현장인 필리핀 동쪽의 작은 섬 펠렐리우에 도착하자마자 산산이 부서졌다.

전투가 "격렬하기는 하지만 사흘이면 끝날 것"이라는 소대장의 호언과는 달리 실제로는 1944년 9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10주간 벌어진 전투는 군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일본군은 해안선에서 섬 중심부의 지휘본부까지 촘촘히 방어망을 구축했고 미군은 산호 능선을 오가며 방어 진지를 하나하나 격파해야 했다. 항복은 상상조차 하지 않는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끝내는 방법은 그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뿐이었다.

그만큼 적군도 필사적이었고 어떠한 자비나 연민도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저자는 펠렐리우 상륙작전 'D데이'에 처음으로 적군의 시체를 보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위생병이 부상한 병사를 돌보려다 떨어진 포탄에 함께 숨진 현장이었다.

"잘게 부서진 가는 산호 가루들이 붙어 있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창자를 보는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었을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의 내장이 그럴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에 사냥을 나가서 잡았던 토끼나 다람쥐의 내장 같았다.

그 시체들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났다.

"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거의 전원이라고 할 1만1천여명이 죽고, 미군은 8천769명이 죽거나 다쳤다.

특히 저자가 속했던 해병 1사단은 6천526명의 사상자를 내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었다.

중대원 235명 가운데 죽지도, 다치지도 않은 사람은 85명에 불과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크고 치열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10만이 넘는 일본군 정예는 1945년 4월 1일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한 미군을 상대로 최후의 결전에 나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저자가 속한 제1해병사단은 한 달 뒤 교체 투입됐다.

5월 8일 유럽에서는 나치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오키나와의 빗속에서 벌어지는 악전고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적탄으로부터 몸을 숨길 곳이 전혀 없는 개활지는 시체로 뒤덮였고, 적군이건 아군이건 수습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시체 주위를 뒤덮은 구더기는 빗물에 쓸려갔다 다시 모여들기를 반복하고 코안에 가득한 악취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서 "이건 꿈이야. 이제 곧 깨어나면 나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을 거야"라는 주문을 외우는 것뿐이었다.

6월 11~18일 오키나와 쿠니요시-요지-야에서 고지 공방전을 끝으로 일본군은 완전히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확인된 일본군 시신만 10만7천500여 구에 달했다.

미군은 4만명 가까운 사망·실종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저자의 중대원 485명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50명에 불과했다.

저자는 오키나와에서 대기하던 중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태평양전쟁은 끝이 났다.

저자는 제대 후 평범한 민간인의 삶을 살았고 오랫동안 전쟁의 기억과 기록을 묻어두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36년만인 1981년 책을 내면서 그는 "세월이 흘러 더는 밤에 악몽을 꾸다가 벌떡 일어나는 일은 없게 됐다.

이제는 이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깊고 큰 고통을 감당했던 전우들에게 오랜 세월 지고 있던 빚을 갚는 셈이다"라고 밝혔다.

이 책은 태평양 전선을 다룬 대표적인 논픽션으로 꾸준히 사랑을 받아오다 출간 29년 만이자 저자가 사망한 지 9년만인 2010년 HBO에 의해 드라마화되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열린책들. 560면. 2만5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