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석의 데스크 시각] 과거는 블랙홀이다

안재석 금융부장
‘거미줄에 걸린 소녀’라는 영화의 한 장면. 아버지를 여읜 소년에게 여주인공이 묻는다. “아빠가 그립지 않니?” 소년의 대답이 예상을 빗나간다. “아빠는 이제 없어요. 더 이상 생각하면 안 돼요.” 여주인공의 눈이 동그래진다. “왜 안 돼?” 소년은 아버지가 평소 자주 들려줬다는 얘기를 풀어놓는다. “과거는 블랙홀과 비슷하다고 아빠가 그랬어요. 너무 가까이 가면 다 빨려 들어가 사라진다고요. 난 그러고 싶지 않아요.”

‘공수처’가 논란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라는 긴 이름의 조직을 놓고 나라가 또 두 쪽이다. 공수처법을 포함한 사법개혁 법률안은 지난 4월 말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됐다. 숙려기간 180일이 지났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이 법안을 국회 본회의에 부의(附議)하려다 한발 물러섰다. 12월 초로 작전 개시일을 미루는 분위기다.소환된 과거, 합리적 토론 막아

공수처 법안은 검찰총장보다 높은 ‘슈퍼 수사기관’을 설치하는 것이 골자다. 여당은 ‘검찰개혁’을 명분으로 세웠다. 지지층을 결집하고, 반대 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은근슬쩍 ‘과거’도 소환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논두렁 시계’가 시간을 거슬러왔다. 익명의 여당 의원 또는 여당 성향의 일부 언론을 경유해 20년 전 스토리는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공수처 논란엔 합리와 토론 대신 분노와 회한이 자리 잡았다. 냉철한 판단은 그 순간 이미 물을 건넜다.

이번 정부의 ‘과거 소환술’은 곳곳에서 목격된다. 한·일 관계가 대표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은 너무 오래된 숙제”라고 포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동학 농민이 죽창을 들고 환생했고, 400여 년 전 이순신 장군의 12척 배는 다시 돛을 올렸다. 국채보상운동도 역사 교과서 밖으로 튀어나왔다. 거센 반일의 물결. 이성과 경제와 안보는 모두 떠내려가 버렸다. 멀쩡한 일식집이 파리를 날리고, 편의점 일본 맥주엔 먼지만 쌓였다. “어,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생각만 할 뿐 입 밖에 내긴 어려운 분위기. ‘민족 정기’라는 눈부신 깃발에 경기침체 같은 속세의 계산법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과거와 싸우면 미래가 다친다

정부발(發) ‘역사 공부’는 독립유공자 논란으로도 이어졌다. 키워드는 ‘서훈(敍勳)’. 이번에도 신호탄은 문 대통령이 쏘아올렸다. “김원봉의 광복군 합류가 독립운동 역량의 결집 계기였으며 국군 창설의 뿌리와 한·미 동맹의 토대로 이어졌다”는 현충일 추념사는 잠복해 있던 이념 논쟁에 불을 붙였다. ‘밀정’과 ‘암살’이라는 영화가 새삼 주목받았고, 갈팡질팡 중심을 잡지 못한 국가보훈처는 연일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김원봉은 6·25 남침 공로로 김일성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주 52시간제 시행과 최저임금 인상 등의 정책에도 과거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경험했던 그 당시 산업 현장의 퀴퀴한 먼지 내음이 묻어 있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인식의 틀은 골동품이다. 이번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도 밑바닥엔 예전에 겪었던 억울함, 부당함에 대한 ‘분풀이’ 정서가 깔려 있다.온갖 군데 인용되는 윈스턴 처칠은 이런 말도 남겼다. “현재가 과거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 앨빈 토플러는 한발 더 나아가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해법도 제시했다. “과거와 싸우지 말고, 미래를 만들어라. 그러면 미래가 과거를 정리해 줄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만 이런 ‘과거 소환술’로 혼란을 겪었던 건 아닌가 보다. 지금 한반도 바깥은 4차 산업혁명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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