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가정폭력으로 상처 받은 소녀…'허니 버스'에서 위로 받다

할아버지와 꿀벌과 나

메러디스 메이 지음 / 김보람 옮김
흐름출판 / 640쪽 /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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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USA 문학상을 받은 언론인 메러디스 메이는 다섯 살 무렵 부모의 이혼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외가에 몸을 맡긴다. 엄마와 어린 남동생과 함께였다. 유약한 엄마는 유아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해갔다. 그런 엄마를 대신해 양봉가 할아버지와 엄격한 할머니가 어린 메이 남매를 보살핀다. 캘리포니아 빅서 연안 일대에서 100여 개의 벌통으로 벌을 치며 뒷마당의 낡은 버스에서 꿀을 만드는 할아버지 덕분에 메러디스는 자연스럽게 꿀벌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양봉가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에게 벌과 양봉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삶에 대한 가르침을 전한다. 메러디스는 엄마에게 받는 상처가 깊어질수록 꿀벌의 존재와 생태에 몰입한다.

<할아버지와 꿀벌과 나>는 양봉가 할아버지와 꿀벌을 통해 어린 시절의 상처를 극복해낸 메러디스의 회고록이다. 저자는 폭력적인 가정 환경에 놓였던 소녀가 어떻게 독립적이고 정상적인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메러디스는 어린 시절 이혼으로 충격받은 엄마의 절망과 무기력, 그로 인한 폭력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안에 틀어박혀 어른이자 부모의 역할을 외면해버린 엄마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저자는 대학 입학을 앞두고 집을 떠날 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는 지금의 아버지(메러디스에겐 할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친아버지로부터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겪었음을 털어놓는다. 결국 대물림된 폭력으로 모녀가 똑같이 학대를 경험하며 자란 것이다. 저자는 비정상적인 엄마의 모습과 그 속에 숨겨진 사연을 알게 된 뒤에도 끝까지 엄마와 거리를 둔다.이런 메러디스에게 생존과 구원의 열쇠가 돼준 것이 바로 ‘꿀벌’이었다. 저자는 할아버지의 꿀공장인 낡은 군용 버스에 매료된다. 할아버지가 아저씨들과 꿀이 떨어지는 벌집틀을 주고받고, 유리 단지로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꿀을 받아가는 모습을 “마치 춤추는 것 같은 조화로움”이라고 표현한다. 할아버지는 꿀벌의 움직임과 소리를 읽는 방법, 꿀벌들이 동료들과 의사소통을 할 때 내뿜는 냄새를 해석하는 법, 꿀벌이 생태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세심하고 따뜻하게 손녀에게 알려준다. 꿀벌에 대한 할아버지의 애정은 자연에 대한 존중, 나아가 인간에 대한 존중으로 어린 소녀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는 꿀벌을 비유로 들어 어린 메러디스에게 독립적으로 살아나갈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너무 티 내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용기를 돋워줬다. 그리고 벌들은 개별적인 작은 노력이 한데 모여 집단적 힘을 만들어내면서 자기 존재보다 훨씬 더 웅대한 목적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줬다.”

저자는 이처럼 할아버지와 꿀벌을 통해 점차 상처를 극복해나가고 인생의 지혜와 가족의 의미,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배워나간다. 그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돌아보며 이렇게 요약한다. “나도 엄마처럼 내 인생에 결여된 많은 것들로 삶을 정의 내리며 불행하게 사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꿀벌들은 나를 안전하게 지켜줬고, 내게 좋은 사람으로 자라는 법을 가르쳐줬으며, 길을 잃고 헤매던 내 어린 시절을 이끌어 줬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