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Abroad] 체코 소도시 여행 2…쿠트나 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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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트나 호라는 프라하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지만, 그 특유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고 싶다면 하룻밤 이상 머무르기를 권한다.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쿠트나 호라의 새벽을 걷다 보면 중세 거리가 전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 은광으로 영광 누렸던 도시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동쪽으로 약 70㎞ 떨어진 곳에 있는 쿠트나 호라는 유럽 최대의 은 광산이 발견되면서 한때 크게 번성했던 곳이다.
10세기에는 화폐를 만드는 조폐국이 있었고 13∼16세기에는 수많은 광산촌이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14세기 중반에는 동서남북에 큰 대문이 만들어졌고 해자와 요새 등이 설치되면서 훌륭한 방어체계도 갖췄다. 번성기 때 화폐를 만들던 '이탈리안 궁전'을 둘러보면, 당시 이곳의 화폐 제작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화폐 기술자들이 동전을 만들어 이런 이름을 얻었다.
성을 방불케 할 정도로 웅장한 이 건물은 실제 체코 왕들이 쿠트나 호라를 찾았을 때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탈리안 궁전에서는 예전 화폐 제작 도구를 재현해놓아 직접 화폐를 만들어볼 수도 있다.
은광 덕분에 쿠트나 호라는 보헤미아 왕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 중심지로 발돋움했고 건축도 발달했다.
큰 번성을 누리던 이곳도 그러나 매장된 은이 바닥나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14세기 무렵 유럽을 휩쓴 흑사병을 피할 수 없었다.
이곳에는 흑사병 희생자들의 해골로 장식한 성당이 있다. ◇ 후스전쟁의 배경이 된 쿠트나 호라
쿠트나 호라를 찾은 것은 조금 찌푸린 날이었다.
어쩌면 이런 날씨가 쿠트나 호라에 어울릴지도 모른다.
'사람의 뼈로 성당을 장식하다니…'
살짝 부담을 느끼며 인포메이션 센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문화해설사인 하나 보타보바 씨를 만나 '성모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성당'으로 향했다.
1282년에서 1320년에 걸쳐 건축된 성당은 후스전쟁의 주 배경이 된 곳으로, 전쟁 당시 소실됐다가 17∼18세기 다시 지어졌다.
보타보바 씨의 입에서 나온 후스전쟁이라는 단어는 고교 시절 세계사 교실로 안내했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로마 가톨릭의 부패를 지적하다 화형에 처해진 체코의 종교 개혁가다.
1415년 후스가 처형된 뒤 시작된 후스전쟁은 1419∼1434년 후스파가 귀족층들이 지지한 독일 황제 겸 보헤미아 왕의 군대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다. 농민과 하층 시민들이 중심이 된 후스파는 당시 프라하교회를 좌지우지했던 대학교수나 귀족 등에 맞서 싸웠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와 황제 지기스문트가 다섯 차례나 십자군을 조직해 진압하려 했으나 얀 지슈카 장군이 이끄는 후스파에 번번이 패했다.
얀 지슈카는 병력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들에게 특별한 무기를 주지 않고, 그들에게 익숙한 농기구나 마차 등을 활용해 싸우게 하는 게릴라 전법으로 큰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후스파는 내부 분열을 일으켜 귀족파에 패배하고 1436년 이그라우협정을 맺은 뒤 전쟁은 끝나게 됐다.
성모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성당도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성당 내부에는 당시 희생됐던 수도승들의 유골이 보관돼 있다.
◇ 세들레츠 해골 성당
일단 성모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성당에서 인골을 접하고 나니 해골 성당을 볼 용기가 약간은 생겼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행지 5선' 등 자극적인 기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곳이 바로 이곳, 내부를 해골로 치장한 세들레츠 해골 성당이다. 해골 성당의 기원은 이렇다.
13세기 예루살렘에서 한 줌의 흙을 가져와 당시 이곳에 형성된 묘지에 뿌리자 너도나도 이곳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14세기 흑사병과 후스 전쟁으로 숨진 4만여 명의 시신이 이곳 주변에 묻혔다.
수없이 나뒹구는 유골들을 1870년 조각가 프란티제크 린트가 성당 벽면에다 장식하면서 해골 성당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있다. 그 정면 위에는 해골로 장식된 십자가가 있고 내부에는 해골로 여러 가지 장식이 돼 있다.
내부로 들어가니 뼈로 장식된 샹들리에가 사람들을 맞이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다.
나오고 나니 가슴이 진정됐다.
돌아오는 길, 1493년 건축된 고딕 석조분수가 독특한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었다.
마치 왕관처럼 보이는 이 분수는 옛날에 4km 길이의 목제 파이프를 통해 쿠트나 호라 시내로 물을 운반해 저장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 성 바르바라 대성당 성 바르바라 성당은 쿠트나 호라의 대표적인 유적지 가운데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1388년 짓기 시작했으나, 후스전쟁 등 우여곡절 끝에 1905년이 되어서야 완공됐다.
바르바라 성당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 일출을 보기 위해 도시 이곳저곳을 거닐던 중 발견한 보석 같은 곳이다.
프라하의 카를교 위에 양옆으로 늘어선 동상들과 비슷한 조각품들이 이곳에도 있다.
오른쪽에는 거대한 예수회 대학 건물이 우뚝 서 있고, 언덕 아래 왼편으로는 탁 트인 시내 전경이 보인다. 조용한 새벽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장엄한 소리에 이끌려 홀린 듯 성당으로 걸어갔다.
18세기에 건립된 파이프 오르간이 인상적인 성당으로, 오르간에는 700개의 파이프와 3개의 건반, 52개의 조절기가 달려 있다.
잘 비질된 길은 깔끔했고 무엇보다 아무도 없었다.
이렇듯 아름답고 평화로운 새벽길을 걸으니 프라하 카를교에서 인파에 시달리며 걷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데 있는 것 아닌가.
그 누구와도 맞닥뜨리지 않는 적막한 새벽은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저 멀리 왼편 도시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다.
독특한 텐트 형식의 지붕들 위로 새들이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돌아오다가 길바닥을 헝겊으로 정성스레 닦고 있는 중년 여인을 만났다.
가까이 가서 물어봤더니 2차 세계 대전 때 희생된 유대인들의 이름을 새긴 명판을 닦고 있다고 한다.
그 집에 살고 있던 5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구호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방법으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가슴에 새기는 유럽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쿠트나 호라의 새벽을 걷다 보면 중세 거리가 전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 은광으로 영광 누렸던 도시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동쪽으로 약 70㎞ 떨어진 곳에 있는 쿠트나 호라는 유럽 최대의 은 광산이 발견되면서 한때 크게 번성했던 곳이다.
10세기에는 화폐를 만드는 조폐국이 있었고 13∼16세기에는 수많은 광산촌이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14세기 중반에는 동서남북에 큰 대문이 만들어졌고 해자와 요새 등이 설치되면서 훌륭한 방어체계도 갖췄다. 번성기 때 화폐를 만들던 '이탈리안 궁전'을 둘러보면, 당시 이곳의 화폐 제작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화폐 기술자들이 동전을 만들어 이런 이름을 얻었다.
성을 방불케 할 정도로 웅장한 이 건물은 실제 체코 왕들이 쿠트나 호라를 찾았을 때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탈리안 궁전에서는 예전 화폐 제작 도구를 재현해놓아 직접 화폐를 만들어볼 수도 있다.
은광 덕분에 쿠트나 호라는 보헤미아 왕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 중심지로 발돋움했고 건축도 발달했다.
큰 번성을 누리던 이곳도 그러나 매장된 은이 바닥나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14세기 무렵 유럽을 휩쓴 흑사병을 피할 수 없었다.
이곳에는 흑사병 희생자들의 해골로 장식한 성당이 있다. ◇ 후스전쟁의 배경이 된 쿠트나 호라
쿠트나 호라를 찾은 것은 조금 찌푸린 날이었다.
어쩌면 이런 날씨가 쿠트나 호라에 어울릴지도 모른다.
'사람의 뼈로 성당을 장식하다니…'
살짝 부담을 느끼며 인포메이션 센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문화해설사인 하나 보타보바 씨를 만나 '성모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성당'으로 향했다.
1282년에서 1320년에 걸쳐 건축된 성당은 후스전쟁의 주 배경이 된 곳으로, 전쟁 당시 소실됐다가 17∼18세기 다시 지어졌다.
보타보바 씨의 입에서 나온 후스전쟁이라는 단어는 고교 시절 세계사 교실로 안내했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로마 가톨릭의 부패를 지적하다 화형에 처해진 체코의 종교 개혁가다.
1415년 후스가 처형된 뒤 시작된 후스전쟁은 1419∼1434년 후스파가 귀족층들이 지지한 독일 황제 겸 보헤미아 왕의 군대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다. 농민과 하층 시민들이 중심이 된 후스파는 당시 프라하교회를 좌지우지했던 대학교수나 귀족 등에 맞서 싸웠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와 황제 지기스문트가 다섯 차례나 십자군을 조직해 진압하려 했으나 얀 지슈카 장군이 이끄는 후스파에 번번이 패했다.
얀 지슈카는 병력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들에게 특별한 무기를 주지 않고, 그들에게 익숙한 농기구나 마차 등을 활용해 싸우게 하는 게릴라 전법으로 큰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후스파는 내부 분열을 일으켜 귀족파에 패배하고 1436년 이그라우협정을 맺은 뒤 전쟁은 끝나게 됐다.
성모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성당도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성당 내부에는 당시 희생됐던 수도승들의 유골이 보관돼 있다.
◇ 세들레츠 해골 성당
일단 성모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성당에서 인골을 접하고 나니 해골 성당을 볼 용기가 약간은 생겼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행지 5선' 등 자극적인 기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곳이 바로 이곳, 내부를 해골로 치장한 세들레츠 해골 성당이다. 해골 성당의 기원은 이렇다.
13세기 예루살렘에서 한 줌의 흙을 가져와 당시 이곳에 형성된 묘지에 뿌리자 너도나도 이곳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14세기 흑사병과 후스 전쟁으로 숨진 4만여 명의 시신이 이곳 주변에 묻혔다.
수없이 나뒹구는 유골들을 1870년 조각가 프란티제크 린트가 성당 벽면에다 장식하면서 해골 성당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있다. 그 정면 위에는 해골로 장식된 십자가가 있고 내부에는 해골로 여러 가지 장식이 돼 있다.
내부로 들어가니 뼈로 장식된 샹들리에가 사람들을 맞이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다.
나오고 나니 가슴이 진정됐다.
돌아오는 길, 1493년 건축된 고딕 석조분수가 독특한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었다.
마치 왕관처럼 보이는 이 분수는 옛날에 4km 길이의 목제 파이프를 통해 쿠트나 호라 시내로 물을 운반해 저장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 성 바르바라 대성당 성 바르바라 성당은 쿠트나 호라의 대표적인 유적지 가운데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1388년 짓기 시작했으나, 후스전쟁 등 우여곡절 끝에 1905년이 되어서야 완공됐다.
바르바라 성당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 일출을 보기 위해 도시 이곳저곳을 거닐던 중 발견한 보석 같은 곳이다.
프라하의 카를교 위에 양옆으로 늘어선 동상들과 비슷한 조각품들이 이곳에도 있다.
오른쪽에는 거대한 예수회 대학 건물이 우뚝 서 있고, 언덕 아래 왼편으로는 탁 트인 시내 전경이 보인다. 조용한 새벽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장엄한 소리에 이끌려 홀린 듯 성당으로 걸어갔다.
18세기에 건립된 파이프 오르간이 인상적인 성당으로, 오르간에는 700개의 파이프와 3개의 건반, 52개의 조절기가 달려 있다.
잘 비질된 길은 깔끔했고 무엇보다 아무도 없었다.
이렇듯 아름답고 평화로운 새벽길을 걸으니 프라하 카를교에서 인파에 시달리며 걷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데 있는 것 아닌가.
그 누구와도 맞닥뜨리지 않는 적막한 새벽은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저 멀리 왼편 도시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다.
독특한 텐트 형식의 지붕들 위로 새들이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돌아오다가 길바닥을 헝겊으로 정성스레 닦고 있는 중년 여인을 만났다.
가까이 가서 물어봤더니 2차 세계 대전 때 희생된 유대인들의 이름을 새긴 명판을 닦고 있다고 한다.
그 집에 살고 있던 5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구호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방법으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가슴에 새기는 유럽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