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 사로잡은 韓 단색화…"마대 활용한 修行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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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현대미술관 재개관전에한국 단색조(모노크롬) 회화의 1세대 작가 하종현 화백(84)은 1960년대부터 ‘한국적 회화’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숨차게 달려왔다. 그의 미술 인생은 도전과 실험의 연속이었다. 홍익대 미대를 나와 1962년부터 1968년까지 즉흥적인 추상화 장르인 앵포르멜 스타일에 몰두한 그는 전위적 미술가그룹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하고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해 물성을 탐구했다.
참가한 하종현 화백
1974년 제작한 '접합 74-26'
앤디 워홀·마크 로스코·잭슨 폴록 등
현대미술 거장 작품과 함께 전시
MoMA에 한국 단색화 처음 걸려
1974년 마대(캔버스) 앞면에 그리지 않고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 넣는 독특한 작업인 ‘배압법(背押法)’으로 현대 회화에 대한 고정 관념을 뒤엎었다. 베니스 비엔날레, 파리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 굵직한 국제전은 물론 미국과 유럽의 유명 화랑에 잇달아 초대되며 박서보, 이우환과 더불어 한국 추상미술의 ‘간판’으로 우뚝 섰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과 서울시립미술관장, 홍익대 미술대학장을 지낸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성장과 변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하 화백의 예술세계가 ‘현대미술 1번지’ 뉴욕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1970년대 작 ‘접합(Conjunction) 74-26’시리즈가 지난달 21일 재개관한 뉴욕 현대미술관(MoMA) 기획전에 소개돼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하 화백의 그림은 4층 데이비드 게펜 전시장에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아그네스 마틴, 도널드 저드, 사이 톰블리, 앤디 워홀, 제스퍼 존스 등 미국 현대미술 거장들의 1940~1970년대 작품과 나란히 걸렸다. 한국의 대표 장르 단색화가 뉴욕현대미술관 전시장에 걸린 건 처음이다.‘접합 74-26’은 미군 군량미를 담던 마대 자루를 넓게 펼쳐 각 모서리에 고정하고, 물감을 마대 위에 펴 바른 다음 마대 자루 뒷면에 두꺼운 흰색 물감을 칠해 앞면으로 밀어 넣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물감이 마르기 전 마대를 수직으로 세우면서 흰색 물감이 다양한 각도로 흘러내리는 것이 특징이다. 하 화백의 단색화는 앞서 보스턴미술관과 시카고미술관, 아테네 조지 이코노무 컬렉션미술관 소장품 목록에도 이름을 올려 주목받았다.
하 화백은 “국제 화단의 유명 미술관들이 단색화를 서구 미술 사조의 아류가 아니라 한국 고유 독창적인 기법으로 인정한 것”이라며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데는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 공이 크다”고 소감을 밝혔다.84세에도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그는 국내외에서 주목받으며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3월 도쿄 블럼앤드포갤러리와 9월 밀라노 카디갤러리에 이어 내년 10월에는 런던 알민레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그의 단색조 미학은 외국인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색채로서의 물감뿐 아니라 물질로서의 물감이 녹아 있어서다. 색은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흰색으로부터 흙담, 기왓장, 도자기, 단청에서 따온 것이다. 전통 색채는 마대와 만나고 작가 자신의 신체적 동작이 더해지면서 물질과 행위의 흔적이 결합된 결과물로 완성된다.
2010년 초에는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내는 방식에서 벗어나 마대 자체 색을 부분적으로 그대로 드러내거나 앞면의 표면에 그을음을 입히기도 했다. 또 표면을 다시 긁어내 음각 형태로 물감을 노출시키고, 얇은 철사로 서체 같은 표식을 만들었다. 최근 들어서는 적색, 청색, 다홍색, 검은색, 흰색 등 강렬한 물감으로 화면을 장악하고 있다. 온화하면서 고요한 분위기를 내뿜는 호연지기의 필법은 절묘한 ‘무기교의 기교’의 감성 세계를 뿜어낸다.
하 화백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처절하리 만큼 비극적인 상황을 견뎌온 우리 민족의 끈기와 오기를 화면에 담아냈다”며 “배고픔의 상징인 마대 자루를 선택해 진짜 수행하듯 쉼 없이 그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내외 화단에서는 내 그림을 ‘단색화’라고 부르지만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헝그리 아트’”라고 강조했다.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금욕적인 아우라가 배어 있다. 자신을 강하게 억제하고, 욕심을 드러내지 않고 무화시켰기 때문이다. 하 화백은 “욕심을 버리고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붓질했지만 근·현대화 분위기 속에 있었으니, 그 영향이 무언과 무심으로서 나를 이끌어 갔을지도 모른다”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