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만에 그린북서 '경기 부진' 표현 뺀 정부

설비투자 등 일부 지표 회복세
"성장 제약"으로 표현 대체
'역대 최장기간 경기부진' 부담
靑 '저점론'에 힘 실었단 분석도
정부가 공식 경기 진단 보고서인 ‘그린북’에서 7개월 넘게 고수하던 ‘경기가 부진하다’는 판정을 ‘성장이 제약되고 있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바꿨다. 설비투자 등 경기 상황을 좌우하는 일부 지표의 하락세가 진정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일각에서 정부가 역대 최장기간 경기 부진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에 부담을 느끼고 표현을 바꾼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달라진 경기 진단 표현기획재정부는 15일 펴낸 ‘최근 경제동향(그린북) 11월호’에서 “생산과 소비 증가세가 유지되고 있지만 수출과 투자 감소세가 이어지며 성장을 제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4월부터 지난달까지 7개월째 사용한 ‘경기 부진’이라는 표현이 ‘성장 제약’이라는 단어로 대체됐다.

홍민석 기재부 경제분석과장은 “경기가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근 들어 일부 지표가 개선되고 있는 모습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기재부는 개선된 지표로 △올해 1분기 -17.4%였던 설비투자 감소폭(전년 동기 대비)이 2분기 -7.0%, 3분기 -2.7% 등으로 축소되고 △역대 최장기간 하락하던 경기동행·선행지수 순환변동치가 횡보세로 접어들었으며 △반도체 단가 하락세가 멈춘 것 등을 꼽았다. 기재부 관계자는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내년 세계 경제가 반등하면서 한국 경제가 서서히 회복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기재부가 ‘경기 부진’이란 표현을 삭제한 건 청와대의 ‘경기 바닥론’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날 청와대에서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경제 리더십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며 “(국민에게) 경제 상황과 미래 전망 등을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당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재부가 역대 최장기간 경기 부진 판단을 유지하는 건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관측이다.기재부는 단어 하나하나에 너무 의미 부여를 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한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8~2009년에도 경기가 안 좋다는 표현이 장기간 들어갔지만 경기 부진이라는 단어를 계속 쓰지는 않았다”며 “단어 하나하나가 시장에 강력한 시그널이 되는 미국 베이지북(중앙은행의 경제동향 보고서)과 달리 그린북은 전체적인 내용과 맥락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기 저점론’엔 선 그어

경기 바닥론과 관련해 기재부는 “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홍 과장은 “세계 경제가 동반 둔화하는 가운데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 미·중 무역갈등 등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며 “반도체 업황이 곧 회복된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다”고 설명했다. 대외 상황이 조금만 악화해도 지표가 다시 하락세로 돌아설 수 있다는 얘기다.한국 경제의 ‘대들보’인 수출이 반도체를 제외한 다른 주력 품목에서도 감소하고 있는 것 역시 비관적 전망을 키우는 요인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이달 1~10일 수출액은 118억8200만달러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20.8% 줄었다.

조업일수가 지난해보다 하루 적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9.5% 수준의 감소폭이다. 반도체(-33.3%)뿐 아니라 선박(-64.4%) 석유제품(-27.1%) 무선통신기기(-5.6%) 등이 크게 감소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