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생각할 시간 주겠다"…협상중에 자리 박차고 나간 美

한·미 방위비 분담협상 파행 끝에 결렬

한국에 책임 떠넘긴 드하트
"우리측 요청 부응 못해"
美 기선잡기용 변칙 공격
한·미 방위비 분담금의 적정 증액 규모를 놓고 양국 외교당국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한국을 ‘부유한 나라’로 지칭하며 전방위적으로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해오던 미국은 급기야 19일 서울에서 열린 제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3차 회의 도중 “한국에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며 일방적으로 협상 중단을 선언했다.

미국 협상 대표단이 다음 회의 일정도 논의하지 않고 협상장을 떠나버리면서 연내 타결을 목표로 한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해를 넘길 전망이다. 내년에는 한국에 4월 국회의원 총선, 미국에 11월 대통령선거 등 굵직한 정치 일정이 예정돼 있어 자칫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정치 변수와 얽혀 더 풀기 힘든 고차원 방정식이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 등 돌린 韓·美 > 내년도 주한미군의 방위비 분담금을 결정하는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제3차 회의가 19일 파행 끝에 조기 종료됐다. 한국 측 정은보 협상 수석대표(왼쪽)와 미국 수석대표인 제임스 드하트 국무부 선임보좌관(오른쪽)이 각각 협상 결과를 브리핑했다. /연합뉴스
기선제압 나선 美 협상단

이날 미국 협상대표단이 협상 중단 발표와 함께 회의장을 떠나자 한국 대표단은 크게 당황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만큼 미국의 결정은 갑작스럽고 일방적이었다. 미국 수석대표인 제임스 드하트 국무부 선임보좌관은 회의 종료 뒤 곧바로 주한 미국대사관으로 넘어가 “한국 협상팀이 내놓은 제안은 우리 측 요청에 부응하지 못했다”며 회의 파행의 책임을 한국 측에 떠넘겼다.

드하트 수석대표가 언급한 ‘우리(미국) 측 요청’은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이다. 미국은 내년 한국이 내야 할 방위비 분담금을 50억달러(약 5조8000억원)로 책정해놓고 있다. 올해(1조389억원) 대비 여섯 배 가까이 많은 금액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50억달러에는 한국에 전개되는 전략자산 비용뿐 아니라 주한미군의 순환배치, 정찰기, 정찰위성 비용과 한·미 연합훈련에 드는 비용까지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기본 SMA 틀에 정해진 금액만 내놓을 수 있다고 맞서고 있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정해진 대로 △인건비(주한미군 한국인 고용원 임금) △군사건설비(미군기지 내 시설 건설) △군수지원비(용역 및 물자지원)만 내겠다는 주장이다.

한국 협상대표인 정은보 방위비분담협상대사는 이날 외교부 기자브리핑에서 “미국 측의 전체적인 제안과 우리가 임하고자 하는 원칙적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며 “앞으로 계속 노력해 상호 간에 수용가능한 분담이 이뤄질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임하겠다”고 말했다.
“인상 근거 세밀히 요구해야”이날 미국의 일방적인 협상 중단 선언은 기선잡기 차원의 협상 전략으로 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양측 모두 물러서지 않고 기존 입장만 고수하고 있는 현 상황을 깨기 위한 일종의 변칙 공격이란 얘기다. 드하트 수석대표는 ‘위대한 동맹’의 정신을 강조하면서도 “한국 측이 상호 신뢰와 파트너십을 기초로 협력할 준비가 돼 있을 때 협상을 재개하길 기대한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우리 정부도 상호 수용 가능한 범위에서 합리적이고 공정한 분담 원칙에 따라 금액이 결정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한·미 간 신경전이 이어져 본격적인 협상이 내년으로 연기되면 양국의 정치 일정과 맞물려 해법을 찾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당장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국내 정치권에선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17일 “미국이 무리한 증액을 요구할 경우 국회 비준의 비토(거부)권을 강력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연임을 노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한국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일 가능성이 높다.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분담금 대폭 인상 요구가 터무니없다는 것을 미국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라며 “미국은 금액을 산정할 기준이 없을 것이니 우리도 역으로 인상될 금액을 어떻게 사용할지 계획을 달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호/이미아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