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2만구 부검한 법의관 "죽음은 과정"

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

법의학을 흔히 ‘죽은 자들과의 대화’라고 일컫는다. 의학 지식을 가진 법의관들이 부검이란 언어로 말을 걸면 시신은 남아있는 자기 몸을 통해 많은 것을 답해준다. 법의관은 그 안에서 숨겨진 진실을 찾고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영국 법의학자 리처드 셰퍼드는 30년 동안 시신 2만 구 이상을 부검한 베테랑 법의관이다. 영국 헝거포드 총기난사 사건부터 다이애나 왕세자비 사망 사건, 9·11 테러, 발리 폭탄 테러까지 굵직한 사건에 참여하며 ‘죽은 자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가 쓴 <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법의관이란 특이한 삶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법의학자는 어떤 수련 과정을 거치며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어려움과 심적 곤경을 겪고 고민하는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저자는 법의관으로 일하면서 바로 눈앞에서 확인한 자연사와 수상한 죽음부터 살인사건, 정당방위, 아동학대, 돌연사 등 다양한 사망 사례를 그림을 그리듯 담담하게 되짚는다. 대형 참사에 희생된 시신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유족의 거센 항의를 무릅쓰고 손목을 자르기도 했고, 테러 희생자의 손가락에서 결혼반지를 빼내야 했던 씁쓸한 경험담도 소개한다. 이런 처참한 상황을 마주할 때 그는 공포심과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저자는 “냉철한 자세로 진실을 찾고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선 때론 어떤 인간성의 표현을 유예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 역시 인간이기에 심적 고통이 없진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실제로 30년간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악행을 목격하며 느낀 감정을 꾹꾹 억누른 탓에 2016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사회를 위해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굳은 믿음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 믿음이 자살 충동도 이겨내고 정상적인 삶을 되찾게 해준 것이다. 저자는 “죽음은 과정”이라며 “아무리 험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해도 죽음은 결국 가장 높은 단계의 해방과 안식”이라고 말한다. (한진영 옮김, 갈라파고스, 464쪽, 1만8500원)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