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지소미아 조건부 연장" 막판 선회…韓·日 파국은 피했다

文대통령 참석 NSC서 결정
日의 수출규제 해소 전제로
WTO 제소 절차도 정지키로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충남 천안의 MEMC코리아 ‘실리콘 웨이퍼 2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 /천안=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청와대가 일본의 일방적인 수출규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한·일 간 대화 물꼬를 트는 조건으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한시적으로 연기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인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은 지소미아 종료 시한을 6시간 앞둔 22일 오후 6시 브리핑을 통해 이 같은 결정을 발표했다. 김 차장은 “우리 정부는 언제든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효력을 종료시킬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지난 8월 23일 종료 통보의 효력을 정지시키기로 했으며,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이해를 표했다”고 밝혔다. 사실상 수출규제 문제를 해소한다는 전제 아래 조건부로 지소미아 종료를 연기하겠다는 뜻이다.
일본이 지난 7월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발표한 지 144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배제한 지 112일 만에 우리 측의 대화 제안을 받아들인 셈이다. 정부는 양국이 협상을 하는 동안 일본 측의 3개 품목 수출규제와 관련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도 정지하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오후 1시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주재한 NSC에 참석해 관련 보고를 듣고 참모들의 이 같은 결정을 재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의 ‘원칙 외교’가 통한 것이라는 청와대의 평가와 달리 일본 정부는 “한국이 전략적인 관점에서 판단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양국 발표 직후 총리관저를 나오면서 “북한에 대한 대응을 위해 한·일, 한·미·일의 연대와 협력이 중요하다”며 “한국도 그런 전략적인 관점에서 판단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도 기자들에게 “지소미아와 수출규제 문제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韓, 지소미아 일단 살려놓고…"日 수출규제 철회 받아내겠다" 의지
파국은 피한 지소미아…향후 전망은

한·일 양국이 ‘종료 수순’에 들어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의 ‘조건부 연장’에 전격 합의하면서 4개월가량 진행된 양국 갈등이 새 국면을 맞았다. 청와대는 “상당 기간 (협상이) 계속되는 것은 우리가 허용할 수 없을 것”이라며 이른 시일 내 이번 갈등을 매듭 짓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본 측이 “지소미아와 수출규제 문제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맞서면서 한동안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산소호흡기 단 지소미아

정부는 22일 ‘지소미아 종료’와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 중지라는 두 가지 카드를 일본 측에 제안하며 완고하던 일본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 배제 조치를 해결하기 위해 지소미아에 ‘산소호흡기’를 달아놓은 셈이다. 일단 지소미아를 살려놓은 뒤 일본을 압박해 수출규제 철회를 받아내겠다는 전략이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최근까지 한·일 양국 간 외교채널을 통해 매우 실질적인 협의를 해왔다”며 “우리 기본 원칙을 유지해가면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 현안 해결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양국 간 대화를 했다”고 강조했다.정부는 화이트리스트에 한국을 다시 포함하고 3개 품목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가 철회돼야 문제가 완전히 해소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일본이 수출규제를 풀도록 과장급부터 시작해 가급적 빨리 대화 채널을 만들고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배수진 친 韓 “오랜 협상 허용 못해”

최근까지 종료 수순을 밟게 될 것으로 알려졌던 지소미아가 임시 봉합된 것은 일본 측이 지소미아 종료가 불러올 후폭풍을 피하기 위해 사태의 발단인 수출규제 조치 문제를 전향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다는 뜻을 피력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종료 시점이 임박할수록 미국 측의 지소미아 연장 압박 수위가 높아지자 한국도 이에 다소 부담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한·일 양국이 한걸음씩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밀도 높은 협상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직접 만나 담판을 지을 수 있다는 관측도 유력하게 제기된다. 다음달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열릴 예정인 한·중·일 정상회의를 통해 연내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협의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을 경우 언제든 일본에 대한 WTO 제소 절차를 재개할 수 있다며 배수진을 쳤다. 한 정부 관계자는 “WTO 제소와 관련해 완전 중단이 아니라 일시 중지(suspend)일 뿐이란 점이 중요하다”며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에 다시 포함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청와대 역시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의가 진행되는 동안 잠정적으로 지소미아 종료를 정지한다는 것”이라며 “상당 기간 (협상이) 계속되는 것은 우리가 허용할 수 없을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이다.

엄격한 수출관리 변화없다는 日

하지만 일본 측이 청와대의 발표와 다소 온도차가 있는 입장을 전하면서 시간을 다소 벌었을 뿐 결국 ‘미봉책’에 그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아베 총리는 양국 발표 직후 “북한에 대응하기 위해 한·일, 한·미·일의 연대와 협력이 중요하다”며 “이번에 한국도 그런 전략적인 관점에서 판단했다고 생각한다”고 선을 그었다. 일각에서는 한국 정부가 ‘현금’을 주고 대신 어음만 받은 꼴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한·일 정부의 입장 차이가 있는 것 같다는 지적에 “일본이 그렇게 발표했다면 이는 한·일 외교 합의에 대한 잘못된 행동이라고 본다”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 철회와 화이트리스트 배제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일 우호 협력 관계가 정상화되기는 어렵다고 본다”고 강조했다.이번 봉합 과정에서 한·일 갈등의 단초가 된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논의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양국의 입장을 좁히려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 역시 “근본적인 문제는 옛 한반도 출신 노동자(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라며 “한국 측에 하루 빨리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도록 요구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재원 기자/도쿄=김동욱 특파원/조재길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