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했던 홍콩 & 영화 이야기
입력
수정
천장지구, 화양연화 등 영화 속 명소런던과 뉴욕에 이어 아시아 최대의 국제 금융 센터로 꼽히는 홍콩은 동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매우 독특한 나라이다. 방언을 포함한 다양한 언어와 종교들이 어우러진 높은 문화적 관용 정신을 바탕으로 홍콩 사회는 옛 문화를 보존하고 전통과 혁신을 혼합하여 변화를 거듭해 왔다. 나이 지긋한 남성이 디지털 타블렛으로 중국 전통 보드 게임, 마작을 즐기고, 풍수 전문가와 상의해 디자인된 최첨단의 고층 빌딩을 들어서는 곳이 바로 홍콩이다.
옛것과 현대가 어울러진 홍콩 이야기
◆홍콩느와르 영화의 풍경이 펼쳐지는 홍콩1842년 체결된 난징 조약(南京條約) 이전의 중국 대륙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까지 다양하게 피워온 중국의 철학 사상들과 무대 산업인 경극이 영국과 일본에 의한 식민지 시절, 각 나라의 문화들이 남긴 유산들과 얽히고 설켜 홍콩만의 특유의 문화와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고, 이는 1970~1980년대 세계적으로 꽃을 피운 홍콩 영화 산업의 근간이 된다.
한류에 앞선 ‘향(香)류’라 불리기도 하는 홍콩 영화의 전성기 시절, 코믹 쿵푸 영화의 대표 주자 성룡, 칼 대신 권총을 잡은 현대식 무협, 홍콩 느와르 작품들로 사랑받은 저우룬파(周潤發), 류더화(劉德華), 장궈룽(張國榮), 그 바톤을 이어받아 90년대에는 로맨스 장르가 주류를 끌면서 린칭샤(林靑霞), 장만위(張曼玉) 등 여배우들이 스타로 떠올랐다.
1989년 한 국내 초콜릿 브랜드는 장궈룽이 출연한 광고 덕분에 매출이 300배 이상 늘어났을 뿐 아니라 광고 송출 시간을 묻는 문의가 폭주하여 이에 신문에 광고 시간을 따로 공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장궈룽의 신드롬은 당시 한국에서의 홍콩 영화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최근 몇 년간 우리가 사랑했던 홍콩 영화들이 국내에서 재개봉을 하며 그 시절을 함께 한 30-50대뿐만 아니라 과거의 그리움을 넘어선 갈망의 표출, 레트로(Retro)가 뉴트로(New-tro)라는 개념으로 확장,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여 10-20대를 비롯해 전 세대에 어필하고 있다.
영화 속 잔상(殘像)들이 진하게 남는 영화 속 홍콩의 명소들을 되짚어보자.
◆ 올드 타운 센트럴의 마법의 계단,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홍콩 젊은이들의 이별과 만남을 그린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 1994) 속 나른한 오후, 짧은 커트 머리의 왕페이가 길게 뻗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짝사랑하는 경찰 663, 량차오웨이(梁朝偉)의 집으로 향하는 길 그리고 그의 집을 훔쳐보는 장소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세계에서 가장 긴 옥외 에스컬레이터’라는 수식어답게 올드 타운 센트럴의 중요한 거리들을 빠짐없이 지난다. 건물과 직접 이어지는 통로들도 많아 원하는 목적지 바로 앞까지 여행자들의 걸음을 배웅한다. 이에 올드 타운 센트럴에서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여정의 중심으로 삼고 발길 가는 대로 골목을 돌아보는 것이 좋다.
▲과거 경찰서였던 타이퀀
나이트 라이프의 명소, 란콰이퐁과 홍콩에서 가장 트렌디한 거리, 소호 사이 드넓은 블록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타이퀀(Tai Kwun)은 과거 경찰서였다. 1864년에 지어진 건물들은 1995년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약 10여년의 레노베이션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은 역사적 유산을 고스란히 살리는 동시에 컨템포러리 아트 갤러리와 공연장을 새롭게 덧붙여 우아한 건축적 풍경으로 완성시켰다. 광둥어로 ‘큰 집’, 즉 경찰서를 의미하는 이름과 바(Bar)로 변신한 옛 감옥 등은 건물이 가진 홍콩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있다.
◆홍콩 최고의 전망 스팟, 빅토리아 피크홍콩의 중국 반환 시점인 1997년 직전, 혼란스러웠던 젊은이들의 애절한 로맨스 영화, 유리의 성(琉璃之城, 1998)은 싱그러운 린리후이(舒淇)와 리밍(黎明)의 모습과 섬세하면서 따뜻한 여명의 목소리가 더해져 더 아련하게 다가오는 노래, 트라이 투 리멤버(Try to Remember)로 유명하다.
빅토리아 피크에 올라 사랑을 확인하는 두 주인공들 뒤로 화려한 홍콩의 야경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홍콩 섬 최고의 고도, 높이 약 552m의 타이펑산 전망대에 서면 숲과 바다 그리고 고층 빌딩이 한 눈에 들어온다.
▲피크 트램, 도심 속 공중 정원 산책
전망이 좋아 19세기부터 영국인들의 거주지로 사랑받았으며 별다른 교통 수단이 없던 시절 , 영국인들은 가마를 타고 이동했다. 1888년 개통된 산악 기차 피크 트램은 45도가 넘는 급경사로롤 오르는 홍콩의 명물로 정상에 도달하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피크 트램으로 빅토리아 피크에 올랐다면 홍콩 주민들의 산책과 조깅 코스로 사랑받는 ‘피클 서클워크’로 향해보자. 피크에서와는 다른 각도의 빅토리아 하버뷰와 함께 홍콩섬 남부의 자연 경관을 감상하며 내려오면 영화 속에 등장한 홍콩대학교에 다다른다.
◆ 전통적이면서 현대적인 홍콩 그 자체 – 치파오
홍콩의 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 2000)는 관능적이면서 우울한 소재를 농밀하게 그려내는 왕가위 감독의 미장센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자 2016년 BBC가 선정한 21세기 영화 100선에 2위로 선정될 정도로 손꼽히는 명작이다.레드, 그린, 블루 등 각각의 색들이 가진 의미를 더한 적절한 공간과 소품의 배치로 영상미와 더불어 메타포(metaphor, 은유의 힘)를 더했고 장만옥은 무려 23벌에 달하는 다양한 색상과 무늬의 치파오 컬렉션으로 관객들의 매혹시켰다.
▲화양연화 속 치파오와 상하이탕
량창오웨이와 장만위가 마주 앉아 건조한 듯 상대 배우자들의 불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골드핀치 레스토랑(Goldfinch Restaurant)는 아쉽지만 작년 영화 및 기억 속의 장소로 사라졌다.
하지만 치파오를 입고 여느 홍콩의 차찬탱 카페에 앉아 영화 제목 그대로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중국의 전통의 디자인과 현대적 모티브를 결합시켜 세계적인 럭셔리 패션 브랜드로 거듭난 상하이 탕(Shanghai Tang, 上海滩)은 영화 색, 계(色,戒)의 주인공 탕웨이가 입어 더욱 유명해졌다. 상하이 탕의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몽콕의 야시장을 찾거나 홍콩 치파오 대여 및 사진 촬영 서비스를 검색해보자.
◆도심 속 성전, 성마가렛 성당천장지구(天若有情, 1990)의 성지 순례지, 성마가렛 성당(St. Margaret's Church)은 극중 주인공인 류더화와 우첸롄(吳倩蓮)이 이별을 예감하고 마지막으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던 곳이었다. 어둠이 내리 앉은 거리에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은 우첸롄이 하얀 턱시도 자켓을 입은 류더화의 빨간 오토바이 뒷편에 앉아 성당으로 향하던 장면은 영화의 포스터 장면으로 쓰일 만큼 강렬하며, 낭만적이면서도 비극적인 그들의 사랑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장소이다.
홍콩섬 북단 코즈웨이베이에 있는 성녀 마가렛(St. Margaret Mary Alacoque)을 기리는 아시아 최초 교회로 1925년 세워졌다. 높게 치솟은 빌딩숲 가운데 낮은 높이의 성전은 홍콩인들에게 마음의 안신처가 되고 있다.
▲외국인이 즐겨찾는 해피 밸리 경마장
1841년 엘리트들의 오락거리로 시작되어 영국인들이 모이던 사교장이었던 해피 밸리 경마장은 홍콩 현지인들뿐만이 아니라 외국인 여행객들까지 찾는 명소가 되었다. 홍콩 사람들의 80%가 참여하는 스포츠이자 엔터테인먼트로 성장한 마치 축제와 같은 흥겨운 경마의 현장에 함께 하고 싶다면 매주(여름 제외) 수요일 밤 이 곳을 찾아보자.
김하민 여행작가 ufo204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