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잣대로 '나쁜 기업' 낙인…국민연금 입맛대로 '경영간섭'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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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지는 국민연금 경영참여 (下)보건복지부가 최근 공개한 ‘국민연금 경영참여 목적 주주권행사 가이드라인(지침)’은 국민연금의 기업경영 참여를 본격화하기 위한 정지 작업이다. 지난해 7월 도입된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에 이어 지침으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대상과 절차를 구체화해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자 하는 취지라는 게 정부 설명이다. 하지만 ‘깜깜이 가이드라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기업의 개선 의지나 기업가치 훼손 여부에 따라 주주권 행사 여부가 좌우되는 등 지침 전체에 주관적이고 모호한 표현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곽관훈 선문대 경찰행정법학과 교수는 “이번 지침이 객관적인 기준으로 외관을 포장했지만 세부 내용을 들여다보면 주관적인 단어로 국민연금에 과도한 재량권을 허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깜깜이 가이드라인
지침 곳곳 주관적 판단
자의적·추상적 표현 남발
복지부와 국민연금은 지난 13일 공청회를 열어 이 지침을 공개했다. 이달 말까지 확정해 바로 시행에 들어갈 계획이다.모호한 잣대들
국민연금의 경영참여 주주권행사 요건 중 하나인 ‘예상하지 못한 우려사안’이 대표적인 깜깜이 조항으로 꼽힌다. 정부는 포커스리스트로 불리는 국민연금의 중점관리기업 선정 기준으로 △기업의 배당정책 △보수한도 적정성 △법령상 위반 우려로 기업가치 훼손 등을 제시했다. 비공개 대화와 비공개 중점관리, 공개 중점관리 등 절차를 거쳐도 개선되지 않으면 주주제안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각 절차는 1년 단위로 이뤄지는 만큼 기업들은 국민연금의 요구를 검토하고 의견을 개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과정을 단숨에 건너뛰는 예외 조항이 있다. ‘예상하지 못한 우려사안’이다. 지침은 예상치 못한 우려사안을 △기금운용본부의 기업에 대한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평가에서 등급이 2등급 이상 하락해 C등급 이하에 해당하거나 △ESG와 관련해 예상하지 못한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익을 침해할 우려가 발생한 경우로 규정했다. 판단 기준으로는 주주제안의 실효성, 비용효과성, 시장에 대한 상징적 의미 등을 들었다.한 대기업 상장사 임원은 “상징적 의미, 기업가치 훼손, 우려사안 등 국민연금이 내세우는 판단 기준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주관적”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평가 기준으로, 그것도 비공개 평가를 통해 국민연금이 사기업 경영에 간섭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기준도 등급도 깜깜이
더 큰 문제는 예상치 못한 우려사안을 결정짓는 핵심 조건인 ESG 평가 기준과 등급 산정 결과가 철저히 비공개에 부쳐진다는 점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수탁자책임실은 연간 두 차례의 정기평가와 수시평가를 통해 투자 기업을 6개 등급으로 나눈다. 공식적으로 공개된 평가지표는 환경, 사회, 지배구조 각 분야를 합쳐 총 52개지만 ‘논쟁적 이슈’도 반영한다고 명시했다. 논쟁적 이슈란 기업가치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나 쟁점을 의미한다. 기업에 대한 당국의 수사 등이 대표적 사례다. 평가 하위 5~6등급인 C~D등급 기업은 지난해 기준 국민연금의 전체 투자 기업 873곳 중 27.9%에 달했다.국민연금에 과도한 재량권
이 밖에도 지침 곳곳이 기업 경영 간섭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의적 기준으로 채워져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주주권행사 요건으로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익을 침해할 ‘우려’, ‘합리적’ 배당정책, 임원보수한도의 ‘적정성’ 등 범위를 한정할 수 없는 단어를 동원해 국민연금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기업 경영에 자의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길을 열려고 한다는 지적이다.
곽 교수는 “기업 경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인력도 제한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기업 결정의 합리성이나 적정성을 언제나 옳게 판단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건 애초 무리”라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