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영글어 가는 아리차 커피의 꿈

정병국 < 바른미래당 의원 withbg@naver.com >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자동차로 9시간쯤 달리면 세계적 커피 산지 예가체프에 다다른다. 커피나무가 온 산을 메운 시골마을 아리차에서 한 농부의 집을 방문했다. 13명의 자녀를 둔 그가 내려준 커피 한 잔은 고된 여정의 피로를 잊게 했다.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에서 최고 품종으로 꼽히는 ‘아리차 브라하누’는 커피농장 관리인이던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최고의 커피를 즐기지 못한다. 아리차에서 생산된 원두는 정부가 전량 수매해 수출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마시는 커피라고는 으깨지고 부서진 찌꺼기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된 세계 최초 국가의 국회의원으로서 6·25전쟁 참전국인 에티오피아에 대한 원조 사업을 점검하러 가는 길이었다.에티오피아는 세계 5위 커피 생산국으로, 국가 전체 수출의 33%가 커피다. 커피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인 나라다. 세계 커피 품평대회에서 매년 최우수 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커피로 인한 수익은 세계 10위에 머물러 있다. 마케팅과 브랜딩 역량 부족으로 저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커피 한 쪽 나지 않지만 커피산업이 가장 발전한 나라 중 하나다. 우리나라 커피 시장은 연 7조원 규모이며, 가공농식품 수출 순위 4위가 커피다. 세계 바리스타 대회 1위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에티오피아의 커피에 우리의 노하우를 결합한다면 지속가능한 원조 모델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한국의 유상 원조로 에티오피아에 커피 가공공장, 박물관, 카페거리 등이 결합된 커피 테마파크를 만들고 무상 원조로 커피 브랜딩 및 마케팅과 교육을 지원하면 커피의 경쟁력은 물론, 관광과 문화가 어우러진 종합발전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이런 요지의 정책을 에티오피아 정부에 전달했다. 재무장관을 비롯한 커피청 관계자들이 그 모델을 보기 위해 한국에 왔다. 강릉의 커피공장에서 양평의 카페거리, 성수동의 도시재생 현장까지 이들을 안내했다. 커피가 도시와 경제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확인한 그들은 크게 놀라워했다. 이후 정책 추진을 위한 양해각서 체결과 사업 구체화 논의가 이어졌다.

브라하누 씨에게 얻어마신 커피 한 잔의 값을 제대로 치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영글어 가고 있다. 그의 아이들이 찌꺼기가 아닌 진짜 커피를 맛보고, 농장이 아닌 학교에서 꿈을 키울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