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 & 이대리] 뒤숭숭한 인사철 사무실 풍경

경질·승진설…조직개편…
사내소문 돌면 '아싸'도 '핵인싸'로

부서이동 소원수리는 구구절절
'인사 백일장'이 따로 없네
연말은 인사의 계절이다. 자기 일 외엔 관심 없는 김 과장도, 일보다는 해외여행 계획에 관심이 많은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족 이 대리도 연말만 되면 사내 정보통을 찾는다. 회사 익명게시판 앱(응용프로그램)에는 누군가의 ‘경질설’과 ‘특진설’이 올라오고, 메신저에는 조직개편과 인사 폭을 예상하는 ‘지라시’가 나돈다.

연말은 평가에도 예민해지는 시기다. 인사평가를 잘 받으려고 열혈 일꾼으로 변신해 연장근무를 일삼는 것은 애교다. 동료 평가가 보편화하면서 상사는 물론 선후배에게도 물질 공세를 아끼지 않는다. 제각기 사정으로 물밑 경쟁이 치열한 인사철, 김 과장 이 대리들의 사무실 풍경을 들여다봤다.첩보전 뺨치는 치열한 정보 경쟁

‘올해 임원인사 11월 29일. 조직개편으로 임원급 대규모 물갈이 예정이라고.’ ‘상반기 인수한 계열사로 인력 대폭 이동 예상.’

인사철이면 카카오톡 대화방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사내 지라시가 나돈다. 회사 직원끼리 익명으로 글을 쓰는 앱인 ‘블라인드’에선 눈치작전이 치열하다. 국내 한 대기업 계열사는 익명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오픈 카톡방을 개설했다. 최근 이 카톡방엔 이모 본부장의 경질설이 올라왔다. 보고를 위해 본부장 방에 갔는데 무엇 때문인지 심기가 불편했고, 본부장이 “나가!”라고 큰소리를 냈다는 둥 구체적인 정황까지 담겼다. 이 회사 유 대리는 “이런 자세한 정보는 올라온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삭제돼 보기가 어렵다”며 “정보를 놓치지 않으려면 오픈 카톡방을 자주 챙겨봐야 한다”고 말했다.대기업에 다니는 박 과장은 인사철을 앞두고 동료, 선후배와 함께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박 과장은 흡연자가 아니지만 함께 나간다. 인사와 관련된 소문을 얻기 위해서다. 그는 “오래된 방식이지만 중요한 정보일수록 입에서 입을 타고 돌아다니기 마련”이라며 “지나고 보면 틀린 정보도 많지만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벼락치기 실적도 효과 있네”

대형 리테일회사에서 근무하는 최 대리는 이번 인사철에 서울로 복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입사 후 4년 내내 지방 순환 근무만 한 그는 지난해 결혼한 신혼인데도 주말 부부 신세다. 최 대리는 ‘서울 복귀 작전’의 핵심을 막판 판매 실적 올리기로 정했다. 자주 연락하지 않던 동창과 친척에게도 사정해가며 판매에 열을 올렸다. 때로는 본인 카드로 결제해 특별판매(특판) 기간에 지역 내 1위를 했다. 최 대리는 “최근 유통업체 업황이 나빠 눈에 띄는 실적을 낸 직원은 더욱 주목받는 분위기”라며 “카드 결제액이 월급보다 많았을 땐 속이 쓰렸지만 서울 근무만 생각하며 버텼다”고 말했다.유능한 인재를 영입하려는 부서장 간 경쟁도 치열해진다. 국내 한 건설사에 다니는 채 대리는 정기 인사를 앞두고 옆 부서 팀장에게 영입 제안을 받았다. 입사 후 3년 동안 줄곧 기술직에서 일한 그에게 생소한 홍보·마케팅 업무였다. 새로운 업무에 목마르던 그에게 ‘단비’ 같은 제안이었지만 마케팅부 직원들이 야근을 일삼는다는 얘기를 듣고선 고민에 빠졌다. 채 대리는 “새로운 업무가 욕심 나지만 지금 부서장 눈치도 보이는 게 사실”이라며 “제안 없이 윗선에서 인사를 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인사 백일장’

서울의 한 중견기업에선 인사철이면 ‘백일장’이 열린다. 이 기업은 부서 이동을 위한 ‘소원수리’를 이메일로 받는다. 부서 탈출을 꿈꾸는 직원들은 연말이면 메모장을 켜고 ‘집필’에 열중한다. 내가 이 부서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왜 새로운 부서에 가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것은 기본이다. 올해 태어난 아이를 두고 지방에 갈 수 없다는 호소부터, 어머니가 편찮아 가까운 곳에서 모시고 싶다는 사연까지 구구절절한 내용이 인사담당 임원 메일로 쏟아진다.서울의 한 제조업체에 다니는 ‘홍보맨’ 김 과장은 요즘 사내에서 쇄도하는 청탁 전화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인사철이 다가오자 김 과장에게 ‘우리 부서 보도자료 좀 내 달라’는 부탁이 몰리고 있어서다. 부서 실적을 알리기 위해 대외 홍보에 열을 올리는 분위기지만 상당수는 거절할 수밖에 없다. 거절당한 몇몇은 재차 부탁하거나 서운한 티를 내기도 한다. 김 과장은 “기사로 나가기엔 중요도가 떨어지는 내용이 많아 힘들다”며 “하지만 그들에게 승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뻔히 아는 처지여서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업무는 뒷전, 인사만 기다려

한 유통업체에 다니는 김 대리는 지난주부터 사실상 업무에서 손을 놨다. 올해 인사평가가 끝났기 때문이다. 김 대리뿐만 아니라 회사 전체가 개점 휴업 상태다. 지금부터 매장에서 발생하는 매출은 자신의 인사고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들 잘 알고 있어서다.

승진으로 예민해진 상사의 심기를 ‘보필’하는 것도 큰일이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차 과장은 인사철만 되면 상사와 말 섞기를 꺼린다. 평소 온화하던 상사가 인사철만 되면 윗선의 눈치를 보며 ‘라인을 타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져서다. 차 과장은 “평소 정시 퇴근을 장려하던 상사가 얼마 전엔 ‘조직개편 때 갈 다른 곳을 알아보려고 일찍 퇴근하냐’고 했다”며 “지난해 승진에서 미끄러져 더 예민해진 상사 눈치를 보느라 업무에 집중하기가 어렵다”고 털어놨다.인사철만 되면 중요한 프로젝트가 ‘올스톱’될 때도 많다. 대기업에 다니는 배 팀장은 “새 임원이 오면 업무 방향이 변하기 때문에 임원 인사 직전에는 일을 진행하기 어렵다”며 “이번엔 팀을 옮길 것으로 예상되는 직원들이 많아 손을 놓고 있다고 뭐라 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나수지 기자 su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