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팔순 시인이 부르는 '늦저녁 버스킹'
입력
수정
지면A34
고두현 논설위원·시인‘나뭇잎 떨어지는 저녁이 와서/내 몸속에 악기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그간 소리내지 않았던 몇 개의 악기/현악기의 줄을 고르는 동안/길은 더 저물고 등불은 깊어진다/나 오랫동안 먼 길 걸어왔음으로/길은 등 뒤에서 고단한 몸을 눕힌다/삶의 길이 서로 저마다 달라서/네거리는 저 혼자 신호등 불빛을 바꾼다/오늘밤 이곳이면 적당하다/이 거리에 자리를 펴리라’
김종해 시인의 신작 시집 <늦저녁의 버스킹>(문학세계사)을 펼치고 표제작을 읽다가 한참 생각한다. 팔순을 앞둔 노시인이 왜 하필 ‘버스킹(거리 공연)’에 나섰을까. 시인은 “사람 몸 하나가 온갖 감정과 영혼을 담고 있는 악기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며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도, 한 잎의 풀잎에서도 바람이 가진 고유의 악기를 느낀다”고 답한다."사람 몸은 온갖 감정 담은 악기"
그가 저물녘 네거리에서 현악기의 줄을 고른 뒤 온몸으로 연주할 곡목은 무엇일까. 그 목록에는 그동안 못했던 ‘나를 위해 내가 부르고 싶은 나의 노래’와 삶의 고비마다 맞닥뜨렸던 ‘나그네의 한철 시름’, ‘이생에서 뛰놀았던 생의 환희’가 들어 있다.
‘나뭇잎 떨어지고 해지는 저녁/내 몸속의 악기를 모두 꺼내어 연주하리라/어둠 속의 비애여/아픔과 절망의 한 시절이여/나를 위해 내가 부르고 싶은 나의 노래/바람처럼 멀리 띄워 보내리라/사랑과 안식과 희망의 한때/나그네의 한철 시름도 담아보리라/저녁이 와서 길은 빨리 저물어 가는데/그 동안 이생에서 뛰놀았던 생의 환희/내 마음속에 내린 낙엽 한 장도/오늘밤 악기 위에 얹어서 노래하리라’이 버스킹에서 그는 연주자이면서 관객이다. 그의 ‘몸관악기’는 깊은 내면에서 울리는 심금(心琴)이자 우리의 영혼을 건드리는 현금(弦琴)이다. 그는 첫 시집 <인간의 악기>에서부터 사람과 음악을 ‘삶의 오선지’에 그려왔다. 이번 시집에서는 그 선율과 리듬을 더욱 선명한 음표에 담아냈다.
일상에서 체득한 삶의 의미와 행복에 관한 성찰도 전한다. 떨어지는 나뭇잎에서 ‘저마다 몸속에 제 이름을 새긴 문양’을 발견하고, 시멘트 길바닥을 뚫고 나온 풀꽃 앞에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없이 공손해진다.
나는 누구 심금 울릴 수 있을까아내에 관한 시편도 많다. 눈 내린 성탄절 다음날의 결혼식을 떠올리는 ‘축복이 잊히지 않는 이유’, 늙어서야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간 얘기인 ‘호놀룰루는 아름답다’, 갈현동에서 세종로로 이사한 뒤의 일상을 다룬 ‘광화문의 달’ 등이 따스하다. ‘아내를 사랑하라’에서는 해학적인 노년의 사랑법을 현자의 조언처럼 들려준다.
‘프로야구에 빠져 거실의 TV를 보다가도/아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방영시간이면 방을 옮겨라/주중엔 집안에 오래 머무르지 말며/없는 듯 지내고, 소리 내지 말라/(…)/낮시간에 가끔 영화관도 함께 가라/가서, 눈가에 감도는 눈물도 아내 몰래 닦아내라’
그는 또 ‘아내가 생기 있게 살아 있는 삶이 나는 행복하다/아직은 아프지 않고/이 세상에서 아내와 함께하는 삶이/나에게는 은혜롭다’고 고백한다. 아내가 곧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등단 57년째를 맞은 그의 시는 이처럼 삶과 한몸을 이루고 있다. 생의 높낮이를 초월한 달관의 경지처럼 편안하고 울림이 깊다.시집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다시 생각한다. 나는 훗날 ‘늦저녁의 버스킹’에서 무슨 노래를 부를까. 그때 내 몸의 악기에서는 어떤 음이 나올까. 그 소리로 누군가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까.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고 사람들 마음도 갈수록 척박해진다는데….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