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수(保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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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커크의 '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 출간
보수란 무엇인가. 이 말, 또는 이 말이 내포하는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은 물론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거나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서조차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필요한 철학적 근거를 쉽게 설명한 책이 나왔다.
보수의 학문적·사상적 뿌리를 정립한 러셀 커크(1918~1994)의 '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다. 처음 출간된 이래 무려 62년이 지났지만 이 책이 설명하는 보수의 핵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보수란 시간이 흐르면서 가감되거나 수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커크는 '보수주의 철학의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보수의 정신(The Conservative Mind)'을 낸 지 4년 뒤인 1957년 젊은이들에게 여기에서 나오는 보수주의의 개념을 쉽게 소개하기 위해 이 책을 출간했다. 출간 당시 원작의 제목은 'The Intelligent Woman's Guide to Conservatism(지적인 여성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였으나 러셀 커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재출간되면서 제목도 'Russell Kirk's Concise Guide to Conservatism(러셀 커크의 간략한 보수주의 안내서)'으로 바뀌었다. 이 책은 종교적 신앙, 양심, 개인의 독립성, 가족, 공동체, 공정한 정부, 사유 재산, 권력, 교육, 영구불변과 변화, 공화국 등 11개 주제에 걸쳐 우리 문명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무엇이고 진정한 발전과 활력 있는 삶이 어떻게 개인과 사회 차원에서 가능한지를 논한다.
'영구불변과 변화' 편을 보자. 커크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는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보수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오히려 좋은 사회가 되려면 변화는 필수이며 스스로 새롭게 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이미 죽어가기 시작한 셈이나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 생명체가 건강하다면 변화는 정규적인 방법으로, 또 그 생명체의 형태와 본성에 조화로운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미 단계적이고 온건한 변화가 시작됐는데도 즉각적이고 위험천만한 변화를 주장하는 게 급진주의자들이 늘 범하는 잘못 중 하나다.
커크는 "만약 진보와 영구불변함 가운데 더 중요한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영구불변함"이라고 말한다.
이런 믿음의 배후에는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이 있다.
보수주의자는 이상형을 만들어주겠다는 모든 계획을 불신한다.
또 권력에는 위험요소가 가득하고, 따라서 국가에서 권력은 견제되고 균형을 이루며 건전한 헌정체제와 관습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보수주의자들은 '혁신'의 파괴적 가능성을 우려한다.
주제넘은 확신과 열정으로 이뤄진 혁신은 엄청난 재난이 되기도 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나 소련의 집단 농장 실험 등이 살아있는 사례다.
보수주의가 재산권을 신성시해 강자의 기득권을 옹호하고 약자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한다는 주장이 타당한지 의문이 든다면 이 책의 '사유재산' 편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커크는 '재산권'과 '인권'이 충돌한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단언한다.
재산 그 자체는 어떤 권리나 특권도 누릴 수 없다.
재산권은 재산을 소유하고 획득하는 인간의 권리로서 인권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 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면 재산을 소유·획득하는 인간의 권리가 어떤 다른 인권과 갈등을 빚는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생명권과 자유권, 재산권 세 가지 기본권은 서로 동등하고 서로 연결됐다.
재산권이 확보되지 않으면 자유권, 심지어 생명권도 보장되지 않는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재산은 다수의 개인이 통제하므로 누구도 다수 대중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
그러나 집산주의(collectivism) 사회에서 재산은 부자들 개개인보다 대개는 더 힘이 있으나 훨씬 더 사려 깊지 못한 소수가 통제하므로 오히려 훨씬 더 불평등하다.
어느 유일한 주인에게만 먹을 것을 의존해야 한다면 인간은 그저 노예일 뿐이다.
커크는 이어 재산권이라는 긍정적 권리를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는 재산의 책임을 인정하는 데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크든 작든 모든 사람의 재산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며 부의 소유자들은 재산을 관대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용해야 하는 의무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나아가 국가는 재산의 주인 또는 배분자 역할을 해서는 결코 안 되지만 때로는 오만한 부자를 저지하는 조치도 취해야 한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이 책의 해제를 쓴 윌프레드 매클레이 오클라호마대 석좌교수는 "오늘날 미국의 보수 세력은 미국의 세계 지배, 자유무역, 마약 규제, 동성 결혼, 재산권, 이민 제한, 민권 등 공공 정책의 매우 다양한 문제들에서 찬반 양측에 골고루 퍼져 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인 개별 정책에 찬성 또는 반대한다는 것이 보수주의자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잣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일견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 보수주의의 토대라고 한 매클레이 교수는 "러셀 커크는 이 책에서 그런 보수주의를 놀라우리만치 명징하게 설명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수주의란 새로 발명됐다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거쳐 검증된 '지혜의 뭉치'에 해당한다"면서 "그 지혜를 무기로 보수주의자는 이념적으로 추동된 경솔한 변화에 맞서 저항하고, 추상적 혁명 이념의 열정에 신중함이라는 구체적 미덕으로 대항해 왔다"고 강조했다. 이재학 옮김. 지식노마드. 180쪽. 1만5천원. /연합뉴스
보수란 무엇인가. 이 말, 또는 이 말이 내포하는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은 물론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거나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서조차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필요한 철학적 근거를 쉽게 설명한 책이 나왔다.
보수의 학문적·사상적 뿌리를 정립한 러셀 커크(1918~1994)의 '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다. 처음 출간된 이래 무려 62년이 지났지만 이 책이 설명하는 보수의 핵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보수란 시간이 흐르면서 가감되거나 수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커크는 '보수주의 철학의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보수의 정신(The Conservative Mind)'을 낸 지 4년 뒤인 1957년 젊은이들에게 여기에서 나오는 보수주의의 개념을 쉽게 소개하기 위해 이 책을 출간했다. 출간 당시 원작의 제목은 'The Intelligent Woman's Guide to Conservatism(지적인 여성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였으나 러셀 커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재출간되면서 제목도 'Russell Kirk's Concise Guide to Conservatism(러셀 커크의 간략한 보수주의 안내서)'으로 바뀌었다. 이 책은 종교적 신앙, 양심, 개인의 독립성, 가족, 공동체, 공정한 정부, 사유 재산, 권력, 교육, 영구불변과 변화, 공화국 등 11개 주제에 걸쳐 우리 문명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무엇이고 진정한 발전과 활력 있는 삶이 어떻게 개인과 사회 차원에서 가능한지를 논한다.
'영구불변과 변화' 편을 보자. 커크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는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보수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오히려 좋은 사회가 되려면 변화는 필수이며 스스로 새롭게 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이미 죽어가기 시작한 셈이나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 생명체가 건강하다면 변화는 정규적인 방법으로, 또 그 생명체의 형태와 본성에 조화로운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미 단계적이고 온건한 변화가 시작됐는데도 즉각적이고 위험천만한 변화를 주장하는 게 급진주의자들이 늘 범하는 잘못 중 하나다.
커크는 "만약 진보와 영구불변함 가운데 더 중요한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영구불변함"이라고 말한다.
이런 믿음의 배후에는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이 있다.
보수주의자는 이상형을 만들어주겠다는 모든 계획을 불신한다.
또 권력에는 위험요소가 가득하고, 따라서 국가에서 권력은 견제되고 균형을 이루며 건전한 헌정체제와 관습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보수주의자들은 '혁신'의 파괴적 가능성을 우려한다.
주제넘은 확신과 열정으로 이뤄진 혁신은 엄청난 재난이 되기도 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나 소련의 집단 농장 실험 등이 살아있는 사례다.
보수주의가 재산권을 신성시해 강자의 기득권을 옹호하고 약자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한다는 주장이 타당한지 의문이 든다면 이 책의 '사유재산' 편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커크는 '재산권'과 '인권'이 충돌한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단언한다.
재산 그 자체는 어떤 권리나 특권도 누릴 수 없다.
재산권은 재산을 소유하고 획득하는 인간의 권리로서 인권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 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면 재산을 소유·획득하는 인간의 권리가 어떤 다른 인권과 갈등을 빚는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생명권과 자유권, 재산권 세 가지 기본권은 서로 동등하고 서로 연결됐다.
재산권이 확보되지 않으면 자유권, 심지어 생명권도 보장되지 않는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재산은 다수의 개인이 통제하므로 누구도 다수 대중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
그러나 집산주의(collectivism) 사회에서 재산은 부자들 개개인보다 대개는 더 힘이 있으나 훨씬 더 사려 깊지 못한 소수가 통제하므로 오히려 훨씬 더 불평등하다.
어느 유일한 주인에게만 먹을 것을 의존해야 한다면 인간은 그저 노예일 뿐이다.
커크는 이어 재산권이라는 긍정적 권리를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는 재산의 책임을 인정하는 데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크든 작든 모든 사람의 재산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며 부의 소유자들은 재산을 관대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용해야 하는 의무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나아가 국가는 재산의 주인 또는 배분자 역할을 해서는 결코 안 되지만 때로는 오만한 부자를 저지하는 조치도 취해야 한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이 책의 해제를 쓴 윌프레드 매클레이 오클라호마대 석좌교수는 "오늘날 미국의 보수 세력은 미국의 세계 지배, 자유무역, 마약 규제, 동성 결혼, 재산권, 이민 제한, 민권 등 공공 정책의 매우 다양한 문제들에서 찬반 양측에 골고루 퍼져 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인 개별 정책에 찬성 또는 반대한다는 것이 보수주의자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잣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일견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 보수주의의 토대라고 한 매클레이 교수는 "러셀 커크는 이 책에서 그런 보수주의를 놀라우리만치 명징하게 설명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수주의란 새로 발명됐다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거쳐 검증된 '지혜의 뭉치'에 해당한다"면서 "그 지혜를 무기로 보수주의자는 이념적으로 추동된 경솔한 변화에 맞서 저항하고, 추상적 혁명 이념의 열정에 신중함이라는 구체적 미덕으로 대항해 왔다"고 강조했다. 이재학 옮김. 지식노마드. 180쪽. 1만5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