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前회장 타계…각계 인사들의 회고 "청년에 꿈·도전 심어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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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 정신 큰 울림 남겼다"“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1989년 어느 날. 당시 40대 열혈 문인이던 이문열 작가는 무작정 대우그룹 비서실에 전화를 했다.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6명의 젊은 작가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생면부지인 김 전 회장은 두말 않고 “한번 와보라”고 했다. 이 작가는 김 전 회장을 찾아가 “뛰어난 젊은 작가들이 배를 곯아 글을 쓰지 못할 지경이다.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김 전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 조건을 하나 붙였다. ‘익명’으로 월 100만원씩 주겠다고 했다. 당시 신문에 매일 글을 연재해야 벌 수 있는 큰돈이었다. 김 전 회장은 “나한테 이런 좋은 기회를 줘 고맙다”고 되레 감사의 말까지 보탰다. 6명의 젊은 작가는 김 전 회장의 도움 덕분에 생활고를 이겨내고, 한국 문단을 주름잡는 작가로 우뚝 섰다. 이 작가가 전한 김 전 회장의 ‘흔적’이다.잠을 잊은 기업인
김 전 회장이 타계하기 직전인 지난 9일 오후 경기 수원 아주대병원. 손병두 전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이 병실을 찾았다. 부인인 정희자 여사가 양쪽 귀에 보청기를 단 김 전 회장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손병두 부회장님 오셨어요.” 김 전 회장은 잠시 눈을 떠 손 전 부회장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마지막 눈빛에선 미완으로 끝난 세계경영에 대한 아쉬움과 세상에 진 마음의 빚이 희미하게 교차했다. 손 전 부회장은 “털고 일어나셔야죠”라고 말했다. 그게 마지막 인사였다. 김 전 회장은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손 전 부회장은 “아침에도 시간을 아끼려고 샌드위치만 드시던 분인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12일 고인의 마지막 길을 기리는 추도사를 한다.
고인이 남긴 ‘흔적’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기억은 서로 닮아 있었다. 여전히 ‘프런티어맨(변경의 개척자)’이자 ‘일중독자’, ‘승부사’로 통했다. 그는 1990년대 동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심지어 쿠바 등 사회주의 국가까지 뛰어들어 사업을 했다. 1년에 200일 이상 해외에 머물렀다. 국내 기업이 수출과 해외 현지 사업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보여줬다.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한 뒤 세계경영을 앞세워 대우그룹을 재계 2위로 키워냈다.“유럽 등 해외 출장 땐 항상 늦은 저녁에 비행기를 탔습니다. 현지 공항에 새벽에 도착하면 늘 대기실 한편에서 쪽잠을 잤어요. 이동시간과 호텔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였죠. 공항에서 잠이 들어 거래처 미팅에 늦은 적도 있어요.”(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전 (주)대우 사장)
“잠이 없는 분이었어요. 밤에 귀국하면 새벽 2시에 곧바로 힐튼호텔로 가 계속 일을 하셨습니다. 새벽에 호출하실 때도 있었죠. 1년에 그런 적이 한 열 번은 넘어요.”(김우일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거목이 남긴 ‘도전 정신’지난 10일 장례식장을 찾은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은 고인의 영정을 아무 말 없이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봤다. 빈소를 나갈 땐 눈시울을 붉혔다. 할아버지인 정주영 현대 창업주와 이건희 삼성 회장, 구자경 LG 회장 등과 함께 동시대를 보낸 ‘거목’에 대한 존경과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는 “안타깝다”고 했다.
조문 이틀째인 11일에도 ‘작별 인사’는 이어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한국의 1세대 기업인이자 큰 어른을 잃었다”며 “청년들에게 꿈과 도전 정신을 심어준 분”이라고 회고했다.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은 “사업을 할 때 항상 최일선에서 의사결정권자와 만나 담판을 지었다”고 전했다. 《김우중과의 대화》 저자인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돈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나라를 어떻게 살릴까 고민하셨던 분”이라며 “가끔 (고인이) 사업가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했다.
이날 허창수 전경련 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등도 고인의 마지막 길을 기렸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도 빈소를 찾아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애도 메시지를 전했다. 이틀간 빈소를 찾은 각계 인사만 줄잡아 9000여 명에 달했다.김 전 회장의 타계를 계기로 사그라들던 ‘기업가 정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맨주먹으로 기업을 일군 불굴의 도전 정신이 최근 경영 전면에 나선 오너 3·4세 기업인들에게 큰 ‘울림’으로 번지면서다. 한 대기업 임원은 “오너 3·4세 기업인들은 단순히 창업주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업을 물려받은 게 아니냐는 세간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곤 한다”며 “젊은 오너 기업인들 스스로 능력과 리더십을 보여줘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치러진다. 장지는 충남 태안군 선영이다.
장창민/은정진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