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 & 이대리] 부담스러운 송년회…술술 넘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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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 쓸 때만큼또 올 것이 왔다. 직장인에게 한 해를 마무리하기 전 거쳐야 하는 마지막 관문, 연말 회식이다. 요즘 점심으로 대체하거나 ‘술 없는 송년회’도 늘고 있다는데…. 김과장 이대리네 회사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한 해를 마감하는 자리인 만큼 즐거운 마음으로 가려는데 회식 때 건배사를 생각하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어쩌다 한 번이면 좋은데 몇 바퀴를 돌고 나면 이 또한 고역이 된다.
창의력 쥐어짜내는 '송년회 건배사'
이걸 왜 해? 하면서도
'노잼'되긴 싫어 유튜브 뒤적뒤적
“아직도 그런 걸 시키는 회사가 있나요?”라고 묻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반 태어난 세대) 직장인도 적지 않다. 하지만 김과장 이대리팀이 송년회의 힘든 점을 물어보자 많은 직장인이 ‘멋진 건배사’를 준비해야 하는 데 대한 고충을 털어놨다. ‘그냥 하면 되지’ 하고 대충 넘길 수도 없다. 썰렁한 건배사를 하면 회식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은 물론 ‘재미없는 놈’이란 딱지까지 붙게 된다. 어느새 자신에게 찾아온 건배사 차례. 어떻게 재치있게 건배사를 준비하고 회식자리를 슬기롭게 넘기는지 김과장 이대리들의 대처법을 들어봤다.건배사 길면 안 된다
건배사가 길면 대체로 집중을 덜 받기 쉽다. 유통업체에 다니는 정모 주임(30)은 건배사를 좋아하는 팀장 때문에 술자리가 고달프다. 팀원은 12명인데 통상 두 바퀴가 기본이다. 더 힘든 것은 건배사의 길이다. 말 많은 사람이 다수인 정 주임네 팀은 건배사가 한 바퀴 돌다 보면 1시간은 기본이다. 폭탄주와 함께 돌리면 3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올해 국내 한 건설회사에 입사한 사원 윤모씨(28)는 지난주 팀 회식자리에서 낯선 풍경을 목격했다. 50대 한 임원이 건배사를 한다며 갑자기 시를 읊었다. 제목도 모르는 낯선 시 낭독이 1분 뒤 끝나자 팀원들의 박수세례와 함께 건배사가 이어졌다. 윤씨는 “시 한 수에 건배사가 모두 끝날 때까지 잔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팔이 아플 지경이었다”고 말했다.반면 올해 초 제조 중소기업에서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이직한 정모 대리(34)는 건배사 걱정 없이 한 해를 마무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가 이직한 회사는 전체 회식이 거의 없고 회식을 하더라도 원치 않으면 술을 안 먹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건배사를 강요받을 일도 없다. 정 대리는 “얼마 전 송년회를 겸한 술자리를 했는데 건배사를 하고 싶은 사람만 짧게 하니 회식이 2시간을 넘지 않았다”고 말했다.
충성심 드러내고 칭찬 쏟아내라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장모 대리(33)는 모임의 성격과 구성원의 나이대에 따라 다른 건배사를 준비해간다. 장 대리는 “젊은 사람만 모여 있을 때는 회사를 ‘디스’하는 내용의 건배사가 좋은 반응을 얻지만, 일부 부장은 그런 건배사를 불편해한다”며 “부장과 함께하는 자리에는 충성을 맹세하는 건배사를 따로 준비한다”고 말했다.얼마 전 신모 대리(36)네 부서는 기분 좋게 송년회를 시작했다가 부장이 “앞으로는 좀 똑바로 하라”고 부원들을 질책하면서 회식 분위기가 싸늘해진 적이 있다. 그러면서 부장이 신 대리에게 건배사를 해보라고 시켰다. 신 대리는 즉석에서 ‘내년엔 부장 말대로 열심히 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재치있게 분위기를 반전하는 건배사를 했다. 그는 “제 건배사를 듣더니 부장이 흡족한 미소를 짓더라”며 “그 후 분위기가 다시 좋아져 별문제 없이 회식을 마쳤다”고 전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오모 과장(40)은 ‘칭찬’이 무기다. 술자리를 흥겹게 하는 유머감각을 갖추지 못할 바에는 진심을 담은 칭찬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다. 술도 한잔한 김에 평소에는 오글거려서 하지 못하던 선후배들을 칭찬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오 과장은 “매일 마주치는 동료지만 칭찬 릴레이에 모두 귀를 기울였다”며 “스토리가 감동적이면 건배사 자체는 ‘우리 부서를 위하여’처럼 뻔하게 마무리해도 훈훈하게 넘어간다”고 말했다.
다양한 곳에서 아이템을 수집하라자동차 관련 회사에 다니는 김모 매니저(31)는 요즘 유튜브로 건배사를 공부한다. 조만간 있을 부서 송년회를 위해서다. 김 매니저네 팀장은 돌발적으로 팀원을 지명해 건배사를 시킨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지명에 당황한 나머지 ‘소화제(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다)’ ‘사우나(사랑과 우정을 나누자)’ 등 흔한 건배사를 했다가 팀원들의 놀림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실패 끝에 그가 건배사를 배울 만한 곳으로 찾은 게 유튜브다. 김 매니저는 “유튜브엔 건배사에 대한 강의 영상이 수두룩하다”며 “단순히 특이한 건배사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건배사 매너와 현장에서 건배사를 만드는 법까지 나와 있어 도움이 된다”고 했다.
건배사를 모아 놓은 모바일 앱(응용프로그램) 및 인터넷 사이트도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곳에 있는 건배사는 자리에 따라 뜬금없는 데다 성희롱으로 오해받을 만한 불쾌한 내용도 있어 함부로 따라 해서는 안 된다. 2010년 남북한 이산가족 2차 상봉 행사에서 우리 측 상봉단장을 맡은 경만호 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는 ‘오바마(오빠만 바라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봐)’란 건배사를 했다가 성희롱 논란에 휩싸여 자리에서 물러난 적이 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