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진흥법의 황당한 '규제 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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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주도 산업 진흥은 과거에만 유효17일 보도된 ‘진흥법 남발하는 국회’ 기사를 준비하는 도중 김명연 자유한국당 의원실에서 보도자료를 받았다. ‘음악산업 진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는 내용이었다. 개정안은 청소년이 위·변조 신분증을 사용해 오후 10시부터 오전 9시까지 노래방을 출입했을 때 업주의 행정처분을 면제해주는 걸 핵심으로 한다. 김 의원은 “노래방은 대표적인 소상공인 영업 시설 중 하나지만 소관 법률이 달라 소외돼왔다”며 “개정안을 시작으로 소상공인 정책의 사각지대를 발굴해 억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K팝도, K뷰티도 진흥법 없어
조미현 정치부 기자 mwise@hankyung.com
음악산업 진흥법을 살펴봤다. 음악이라는 광범위한 산업을 법으로 진흥한다는 발상 자체도 황당했지만 내용은 더 기막혔다. 총 36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법에서 산업 진흥과 관련된 조항은 10개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규제다. ‘노래연습장 업자의 준수사항(제22조)’까지 들어 있었다. 음악산업을 진흥해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을 높이고 국민 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법에 노래방 규제까지 담겨 있는 것이다.진흥법이 새로운 산업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건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에서 에어비앤비와 같은 공유숙박 서비스를 내국인에게 제공하는 것은 관광진흥법상 불법이다. 논란이 일자 정부는 관광진흥법을 개정하는 대신 규제 샌드박스라는 일종의 특례로 허용해줬다. 이마저도 영업일수 180일로 제한했다.
2000년 시행된 소프트웨어산업 진흥법은 지금까지 20여 차례 개정됐다. 매년 한 번꼴로 개정 작업이 이뤄진 셈이다. 그런데도 시장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해 전부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다. 산업의 급격한 변화를 법이 따라가지 못하는 사례다.
과거 정부 주도의 산업 진흥 정책이 효과를 발휘한 적이 있었다. 반도체산업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1981년 반도체공업 육성 세부 계획을 세우고 대기업의 시장 진입과 성장을 도왔다. 한국 반도체산업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서는 데 정부의 역할이 컸다는 걸 부인하기 힘들다.전문가들은 이런 방식이 “못살고 어려웠을 때나 가능했던 일”(안건준 벤처기업협회장)이라고 잘라 말한다. 2000년 이후 국회에서 발의된 산업 진흥 관련 법안만 100건이 넘지만, 이 기간 세계적인 기업이 얼마나 육성됐느냐는 문제의식이다.
K팝과 K뷰티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건 정부 주도의 진흥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부가 지원하고 감독했다면 K팝과 K뷰티는 성공신화를 쓸 수 없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K팝과 K뷰티는 민간이 창의성을 발휘할 공간이 넓으면 넓을수록 성공 확률이 높다는 걸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