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허보록 신부 "어려운 사람을 예수님처럼 섬겨야"

20년간 군포에서 아동·청소년 돌봐…"예수님도 피난 도중 탄생"
"한국 천주교 수난사는 기적"…"사랑을 받아줄 때까지 기다려야"
"예수님은 헤롯왕의 박해 탓에 이집트로 피난하던 중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천사는 구세주 탄생 소식을 맨 먼저 목동에게 전했습니다.

어렵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뜻하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난민과 이주민을 따뜻하게 맞고 가난한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성탄대축일을 코앞에 둔 22일, 경기도 군포시 당동 주택가에 자리 잡은 4층짜리 다갈색 벽돌 건물로 들어서자 로만 칼라 차림의 서양인 사제가 반갑게 맞아주며 성탄 인사를 건넨다.

프랑스 출신의 허보록(필립보·60) 신부는 머리털이 하나도 없어 할리우드 액션 스타 율 브리너나 브루스 윌리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인상은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해 보인다. 2층 성당을 둘러본 뒤 허 신부의 숙소인 옥탑방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국 생활 30년째를 맞은 허 신부는 군포시 불우 청소년의 대부로 꼽힌다.

1999년 5월 오갈 데 없고 돌보는 이 없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2층 단독주택에 성요한의 집을 열었다. 처음에는 30명 가까이 데리고 살았으나 7명까지만 수용할 수 있는 관련 규정에 따라 5년 뒤 4층 건물을 지어 성야고보의 집을 따로 차렸다.

4층 성요한의 집에는 초등학생, 3층 성야고보의 집에는 중고등학생이 7명씩 살며 형제처럼 지낸다.

10년 전에는 과천시에 성베드로의 집을 마련했다. "사도 요한은 12사도 가운데 가장 젊습니다.

예수님의 부탁을 받고 성모 마리아님을 모셨죠.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가치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요한의 이름을 딴 겁니다.

두 번째 우리 집 이름이 된 야고보는 요한의 형이고, 베드로는 야고보·요한 형제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3명을 가장 아꼈죠. 수원교구장이 '예수님 제자가 9명이나 남아 있으니 아동·청소년 보호시설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더군요.

만일 또 그룹홈을 만든다면 성바오로의 집이라고 짓고 싶어요.

"
허보록 신부는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부모의 천주교 신앙은 독실했지만 성직자를 배출한 집안은 아니었다고 한다.

허 신부도 10대 때는 운동과 팝송을 좋아하는 평범한 청소년이었다.

1975년 남베트남 정권 패망을 전후해 '보트 피플'(Boat People)로 불리는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지의 난민이 노르망디로 많이 이주했다.

허 신부의 부모는 이들을 헌신적으로 도왔고, 자녀들도 아이들과 놀아주고 프랑스어도 가르쳤다.

그는 이때의 경험으로 봉사의 기쁨을 맛봤고 신앙심도 깊어졌다고 털어놓았다.

그를 성직자의 길로 이끈 것은 테레사 수녀였다.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그의 행적을 접하고 허 신부도 한평생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겠다고 결심했다.

"군에 입대하기 전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피정(避靜)하다가 성직에 몸담기로 결심했죠. 형이 먼저 신부가 됐기에 어머니는 충격이 컸죠. 울면서 만류했지만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동생마저 신부가 되는 바람에 3형제 모두 '불효자'가 됐죠. 형은 바티칸 교황청 전례국에서 일하고 동생은 프랑스에서 성당 주임신부 겸 신학교 교수로 활동합니다"
허 신부는 프랑스 캉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84년 로마 그레고리아나 신학대에 입학했다.

테레사 수녀의 길을 따르려 했기에 교구사제가 될 생각은 없었다.

선교사제가 되기로 하고 1986년 파리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에 가입했다.

1658년 창립된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 선교에 앞장서며 지금까지 4천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1831년 조선 초대 주교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입국도 못한 채 중국에서 숨을 거뒀다.

1836년 모방 신부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이래 24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1984년 성인품에 오른 103위 가운데 10명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다.

지금도 허 신부를 포함해 9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을 전혀 몰랐다가 교회사를 공부하며 놀라운 기적을 알게 됐죠.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도 모진 박해 속에서 끝까지 신앙을 지킨 한국인 신도들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테레사 수녀 못지 않게 존경하는 사람은 김대건 신부입니다.

일대기를 읽고 발자취를 더듬어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허 신부는 1990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으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한국 땅을 밟았다.

강화도 내가공소를 거쳐 1993년 안동교구 영주 하망동성당 보좌신부로 임명됐다.

성당에서 무료급식소를 운영했는데, 노인 틈에서 아이들이 밥 얻어먹는 것을 보고 허름한 집을 빌려 무의탁 아동 보호시설 다섯 어린이집을 차린 게 시작이었다.

상주 옥산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뒤 1996년 안동 낙동강변에 보육원 프란치스코의 집과 클라라의 집을 세웠고 1999년 수원교구 관내 군포로 옮겨왔다.

21명의 학생 가운데 탈북자(새터민)는 5명이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은 어머니가 한국인이고 아버지는 중국인이다.

4개월 전에는 베트남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자녀도 들어왔다.

"아이들의 사연은 모두 기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거나 가정이 깨지는 등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상처가 깊죠. 다친 멧돼지처럼 때로는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사랑받은 적이 없으니 사랑할 줄도 모르죠. 학습 능력도 떨어집니다.

중도에 입국해 한국어를 제대로 못 하는 아이도 있고요.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해야죠. 이들이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회복지사들이 아이들을 24시간 돌보지만 후원자와 봉사자의 도움이 없으면 꾸려갈 수가 없다고 한다.

병원에도 가야 하고, 심리 상담과 진로 지도도 받아야 하고, 사교육도 필요하다.

동네의 약국, 태권도장, 수학학원, 안경점 등은 허 신부 아이들에게 특별 할인을 해준다.

팔다 남은 빵을 매일 보내주는 제과점 주인이 있고 매달 쌀을 보내주는 농부도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제30회 아산상 사회봉사 부문 수상자에 선정돼 받은 1억 원의 상금을 요긴하게 썼다.

"아이들이 속 썩일 때는 없느냐"고 묻자 "집안마다 다 똑같다"라고 대답한다.

서로 싸운다든가 학교에 안 간다든가 말썽을 피우면 허 신부도 여느 부모처럼 따끔하게 야단을 친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 간 자립생은 400명이 넘습니다.

이들이 취직해 월급 받았다며 선물을 사 들고 오는 모습을 보는 게 보람이죠. 하루는 한 아이가 '19살이 안 됐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우리 집엔 6살부터 19살까지 살 수 있거든요.

집을 나서면 이모나 삼촌(이곳에서는 사회복지사들을 이렇게 부른다)을 못 볼까 봐 불안한 모양이에요.

'형들처럼 자주 들르면 되잖아'라고 말하며 달랬죠"
허 신부는 아이들만 돌보는 것이 아니다.

이곳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올리는 것은 물론 매주 병자성사(病者聖事)를 집전하고, 매달 남북 평화통일 기원미사도 연다.

인근 군포성당과 금정성당에서도 주일마다 강론한다.

요양원 등 복지시설을 방문해 환자를 위로하는가 하면 외국인 노동자를 돕기도 한다.

그는 최근에 앞날을 생각하면서 사직서를 썼다고 한다.

파리외방전교회 규칙에 따라 죽어서도 한국에 묻히겠지만 자신이 없더라도 이 시설이 유지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야고보의 집과 베드로의 집 대표자를 이미 다른 사람으로 바꿨다. 인터뷰를 끝내며 성탄 축하 메시지를 부탁하자 "내가 만나는 이웃이나 가족 중에 가난한 이들, 결손가정 아동, 새터민, 난민, 아프고 외롭고 괴롭고 억울한 이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포대기에 싸여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임을 알아보고 주님 모시듯 섬겨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