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또 한 해의 분장을 지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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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다해온 시간들해를 넘기는 이맘때면 지난 한 해를 빼곡히 채운 다이어리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때마다 상황과 대상에 맞는 역할을 하느라 참으로 수고로웠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같은 시간 동안 삶의 무대에서 각각 다른 템포와 리듬을 탄다. 단조롭거나 혹은 지나치게 산만했던 장면들 속에서 착한 사람이기도 했고, 나쁜 사람이기도 했고, 더러는 멍청하거나 매우 똑똑함을 자처하며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역할극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나 감상에 빠져본다.
뒤돌아 본연의 모습 살피고 새해 맞길
이경재 <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
오페라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일 또한 인물의 삶을 공연 시간 동안 무대 위에 전개하는 작업인데,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분장이다. 이를테면 신분에 따른 왕이나 귀족, 군인, 하인, 나이에 따른 아이 역할부터 청년, 노인, 성별을 구분하는 남장 여자, 여장 남자, 성격을 묘사하는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 욕심 많은 사람과 소심한 사람, 그리고 악마나 유령 같은 특수 묘사에 이르기까지 분장은 배우를 다양하게 변신시킨다.더욱이 한국에서 상연되는 오페라는 거의 외국 작품이다 보니 분장의 합리적인 준비는 필수불가결하다. 서양 작품 속 등장인물은 말 그대로 서양인이니 동양적 이목구비의 한국 가수들에게 금발 가발을 씌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요즘은 분장 기술도 발달해 이목구비를 자연스럽고 뚜렷하게 강조하거나, 수염과 헤어스타일을 다양하게 구현하는 일도 제법 쉬워졌다.
하지만 분장 기술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분장으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는 끊임없이 무대를 긴장하게 한다. 예컨대 셰익스피어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은 작곡가 구노가 오페라로 만들었는데, 유려하고 절절한 멜로디가 압권이다. 그런데 절세미녀 올리비아 핫세가 줄리엣 역할의 대명사로 인식돼 있어서 여주인공을 맡은 가수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합창단의 대사마저 ‘아,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인가!’라고 나오며 관객의 기대를 한껏 고양하니 분장이 어디까지 그 기대를 충족할 수 있을지 신경이 쓰인다. 코믹극의 콘셉트 때문에 대머리 분장을 한 가수는 머리를 막아놔 노래하기 불편하니 대머리를 못하겠다고 하는 일도 있다. 열창 중 쓰고 있던 가발이 돌아가면서 왕자가 ‘삼돌이’가 돼버리는가 하면 외국의 어떤 무대에서는 오페라 ‘리골레토’를 공연하던 중 주인공 꼽추의 등에 고정해놓은 보형물이 엉덩이로 내려와 꼽추가 아니라 오리궁둥이로 노래를 하게 돼 심각한 오페라를 한바탕 웃음으로 채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분장을 마친 여자 단원 중 몇몇은 분장이 예쁘지 않게 됐다고 불평하며 훨씬 젊고 예쁘게 분장을 고쳐달라고 해서 분장사가 당황하기도 한다.
잘된 분장은 가수의 능력을 배가시키고 무대 위 자신감을 키워주기도 한다. 멋진 선글라스나 모자를 쓰면 한껏 기분이 좋아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할까? 이처럼 분장의 마법은 삶의 모양을 다채롭고 흥미롭게 해준다.
지난 한 해 내가 맡았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부모로, 자녀로, 착한 친구이거나 게으른 동반자로,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 또는 동료에게 갈채를 보내는 친절한 관객으로, 고독하고 우울한 외톨이로, 함박웃음이 즐거운 청춘으로, 우리 모두가 그랬듯이 다양한 역할을 맡아 씩씩하게 살아왔다. 세밑 즈음해 분장을 지우고 나를 찬찬히 돌아봐야겠다. 본연의 나를 살피고 새로 오는 한 해의 역할로 또 분(扮)하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