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에 한 해 18조원 쏟아붓는 삼성전자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기술경쟁력 확보"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내 반도체 생산라인 크린룸 전경.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가 대규모 자금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있다. 근원적 경쟁력 확보를 위한 목적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지난 6월 반도체, 휴대폰 등 사업 분야의 경영진과 잇따라 만나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기술 경쟁력 확보”라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은 반도체 경영진에겐 “삼성은 4차 산업혁명의 엔진인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2030년 세계 1등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며 “이를 위해 마련한 133조원 투자 계획의 집행에도 만전을 기해 달라”고 말했다.스마트폰 사업을 담당하는 최고위급 임원들과의 회의에선 첨단 선행 기술과 신규 서비스 개발을 통한 차별화 방안을 논의했다. “지금은 어느 기업도 10년 뒤를 장담할 수 없다”며 “그동안의 성과를 수성(守城)하는 차원을 넘어 새롭게 창업한다는 각오로 도전해야 한다”는 게 이 부회장의 당부였다.
삼성전자-서울대 공동연구소 내 C랩 팩토리에서 C랩 과제원들이 3D 프린터를 활용해 테스트 제품을 만들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R&D투자 10년새 2배 늘려

삼성전자는 지난해 R&D에 18조6600억원을 투자했다. 역대 최고치다. 2009년 7조5600억원에서 10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었다. 전 세계에 운영하고 있는 연구소만 37개다. 연구원은 6만7000명에 달한다. 이 중 4만8000여 명은 국내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국내 직원 약 10만 명 중 절반 정도가 R&D를 담당하는 것이다.R&D 실적은 특허로 나타난다. 삼성전자는 현재 세계적으로 총 13만5433건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IFI페이턴트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5850건의 특허를 등록해 2위를 차지했다. 유럽에서도 2449건의 특허를 등록해 전체 기업 중 3위에 올랐다. 대부분 스마트폰, 차세대 TV, 메모리 반도체, 시스템 반도체 등에 관한 특허다. 전략 사업과 미래 신기술 관련이다.
삼성전자가 지난 2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북미 최대 주방·욕실 관련 전시회 ‘KBIS 2019’ 개막에 앞서 조리 보조 기능을 수행하는 ‘삼성봇 셰프’를 공개했다. 삼성전자 제공
4차 산업혁명 핵심 AI·로봇 개발 박차

삼성전자는 2017년 11월 삼성 리서치(Samsung Research)를 출범시켜 산하에 인공지능(AI)센터를 신설했다. 4차 산업혁명의 기반기술인 인공지능 관련 선행연구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2018년 1월에 추가로 미국 실리콘밸리에 AI 연구센터를 설립하며 영국, 캐나다, 러시아에 잇따라 연구센터를 개소했다. 현재 5개국에 7개의 AI 연구센터를 운영하고 있다.우수 인재 영입에도 힘쏟고 있다. 연구 분야 최고직인 ‘펠로우’에 지난 3월 임명된 위구연 하버드대 전기공학·컴퓨터과학과 석좌교수를 필두로 세바스찬 승 부사장(전 프린스턴대 교수), 다니엘 리 부사장(전 코넬대 교수) 등이 삼성전자에 들어와 AI 관련 R&D를 이끌고 있다. 삼성전자는 AI 선행 연구개발 인력을 2020년까지 1000명 이상(국내 약 600명, 해외 약 400명)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그간 축적해온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술에 AI를 적용하는 연구도 지속하고 있다. 기존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 삶의 질을 높여 고객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로봇 연구가 대표적인 사례다. 삼성전자는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쇼 ‘CES 2019’에서 차세대 인공지능 프로젝트로 개발된 ‘삼성봇(Samsung Bot)’과 ‘웨어러블 보행 보조 로봇(GEMS)’을 처음 공개했다. 2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KBIS 2019’(The Kitchen & Bath Industry Show)에서도 요리 보조 기능을 수행하는 팔 모양의 ‘삼성봇 셰프’, 집안을 빈틈없이 구석구석 청소하는 ‘삼성봇 클린’을 추가로 공개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쇼 ‘CES 2019’ 삼성전자 부스에서 관람객들이 웨어러블 보행 보조로봇의 시연을 보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반도체 파운드리 ‘초격차’ 확보삼성전자는 올 4월 2030년까지 메모리 반도체뿐만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글로벌 1위를 달성하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분야 연구개발 및 생산시설 확충에 133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2030년까지 국내 R&D 분야에 73조원, 최첨단 생산 인프라에 60조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국내 설비·소재 업체를 포함한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이 예상된다.

삼성이 10년 단위의 장기 비전을 내놓은 것은 2009년 이건희 회장의 ‘비전 2020’ 이후 10년 만이다.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일으킨 아버지처럼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사실상 창업하겠다는 이 부회장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첨단 기술을 연구하는 고급 인력 양성과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조성을 위한 상생 전략도 내놨다.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를 연구하는 고급 인력 1만5000명을 채용하기로 했다. 투자 등으로 인한 직·간접 고용유발 효과는 43만5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국내 중소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업체)의 반도체 설계 및 생산, 마케팅을 위한 인프라 지원을 확대한다는 방침도 정했다. 국내 시스템 반도체 연구개발 인력 양성에 기여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공정 기술 측면에선 올해 초 업계 최초로 극자외선(EUV) 공정을 적용한 7나노(nm, 1nm=10억분의 1m) 제품 양산을 시작했다. 6나노 공정 기반 제품에 대해서는 대형 고객과 생산 협의를 하고 있다. 제품 설계가 완료되면 양산할 예정이다. EUV 5나노 공정은 지난 4월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전자가 시스템 반도체 산업 중에서도 제일 신경 쓰는 것은 파운드리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4분기 전망치 기준)은 17.8%로, 1위인 대만 TSMC보다 34.9%포인트 낮다. 삼성전자는 시설투자액 60조원 중 58조원을 경기 화성 EUV 라인 등 파운드리 경쟁력 향상에 쏟아부어 TSMC를 잡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58조원을 투자기간(12년)으로 나누면 1년에 5조원꼴이다. 작년 삼성 시스템 반도체 투자액의 약 두 배 수준이다.

국가과학기술 발전에 1조5000억원 투자

삼성전자는 2013년부터 국가의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 사업을 통해 10년간 1조5000억원을 출연해 기초과학, 소재기술, 정보통신기술(ICT) 등 3개 연구 분야에서 미래를 책임지는 과학 기술을 지원하고 있다.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은 마음 놓고 어려운 문제에 도전해 볼 수 있는 유연한 평가·관리 시스템을 통해 연구과제가 국내 기업 혁신이나 창업 등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국내 민간기업 최초의 연구지원사업으로 국가에서 지원하기 힘든 도전적인 연구를 돕고 우수한 신진 연구자를 발굴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10월에 새로 선정한 과제까지 포함해 지금까지 기초과학 분야 187개, 소재기술 분야 182개, ICT 창의과제 분야 191개 등 총 560개 연구과제에 7182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했다.성과도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가 미래기술육성사업을 통해 연구를 지원한 이채은 인하대 정보통신학과 교수 연구팀이 내년 1월 열리는 ‘CES 2020’에서 차세대 가상현실 신기술을 선보이게 된 게 좋은 사례다. 연구팀은 2017년 2월부터 가상현실 공간에서 빛이 반사되는 양과 방향을 측정해 더 자연스러운 가상현실 효과를 구현하는 ‘라이트 필드’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삼성의 지원을 받은 연구팀이 CES에 참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팀은 CES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전시관에서 라이트 필드 기술을 기반으로 좀 더 실감 나는 가상현실을 관람객들에게 시연할 예정이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