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령등 '나쁜기업' 이사해임 칼쥔 국민연금 종이호랑이 신세벗나

경영계 "민간기업 경영개입 목적" 반발,전면 재검토 요구

국민연금이 횡령이나 배임, 사익편취 등으로 기업가치를 훼손한 기업대표 이사 등의 해임을 요구할 수 있는 카드를 손에 쥐면서 그간 '주총 거수기', '종이호랑이' 등 비아냥을 듣던 신세를 벗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국민연금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27일 재계의 반대 속에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활동(경영참여) 주주권 행사 대상 기업과 범위, 절차 등을 명시한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의결했다.

가이드라인은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에서 횡령·배임·사익편취 등으로 기업가치가 추락했는데도 이를 개선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 국민연금이 이사해임, 정관변경 등의 주주제안을 할 수 있게 했다.

다만 이사해임 등의 주주제안 자체를 철회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넣기로 했다.지나친 경영간섭이라는 경영계의 반발을 고려해 '산업의 특성과 기업의 여건'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주주제안을 아예 하지 않거나 철회할 수 있게 함으로써 기업을 보호하는 장치를 두기로 한 것이다.

◇ 사회적 물의 일으킨 기업들 '나 떨고 있니?'

이날 기금위 의결로 국민연금이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을 토대로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 시즌에 이사해임 등 적극적 주주 활동에 나설지 주목된다.이렇게 되면 횡령, 배임, 사익편취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고, 기업가치를 떨어뜨려 주주권리를 침해한 기업이 당장 국민연금의 주요 표적으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올해 20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을 뿐만 같은 범죄에 대한 400억원 변호사 비용 대납 혐의로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된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이나, 공정거래위원회가 사익편취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이해욱 대림산업 회장 등이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활동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참여연대 등 시민노동사회단체는 국민연금이 횡령·배임·사익편취 혐의로 사법절차를 밟고 있는 효성 및 대림그룹 등 이사들의 이사직 상실을 내용으로 하는 정관변경 주주제안을 준비하고, 해당 회사에 독립적·공익적 사외이사를 추천할 것을 촉구했다.또 국민연금이 뇌물 및 불공정한 합병비율로 각각 기금에 손해를 끼친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등에 대해서도 국민을 대신해 주주대표소송, 손해배상소송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 주총 거수기 꼬리표 떼나?

국민연금은 2018년 7월말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책임 원칙) 도입 후 적극적으로 주주 권리를 행사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많다.

스튜어드십코드는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가 기업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위탁받은 자금의 주인인 국민이나 고객에게 이를 투명하게 보고하도록 하는 모범 규범을 말한다.

하지만 경영 참여형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 시행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투자기업에 대해 이사해임과 사외이사선임 등 법으로 보장된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됨에 따라 앞으로 주총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후 주총안건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는 비율이 늘었지만, 주총 '종이호랑이' 신세를 벗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이다.

국민연금연구원 최희정 부연구위원은 '해외 연기금의 의결권행사 동향 및 시사점'이란 보고서에서 "노르웨이 국부펀드(GPF), 일본공적연금(GPIF·연금적립금관리운용), 네덜란드 공적연금(ABP), 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CPPIB), 미국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calPERS·캘퍼스) 등 해외 주요 연기금과 비교해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2018년 기준으로 국민연금 반대 의결권행사 비중은 약 19%로 ABP(18%)와 유사하며, GPIF(11%)와 CPPIB(8.69%)보다 높은 수준이지만, 이런 높은 안건 반대 비중이 곧바로 높은 수준의 의결권 행사기준을 적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말이다.

기업이 주총에서 반대 확률이 높은 안건을 제안해 국민연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결과일 수 있으며, 국민연금의 반대가 안건 부결로 관철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주총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2018년 반대 의결권을 던진 주총안건 539건 중 실제 부결된 안건은 5건에 그쳤다.

반대 의결권을 관철한 비율이 0.9%에 불과할 정도로 주총에서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스튜어드십코드 시행 후에도 국민연금은 주주관여 활동과 의결권행사에 조심스러웠다.

GPIF, APG, CalPERS, CPPIB 등 해외 4대 연기금이 투자기업의 영업활동과 지배구조 등에 근본적인 변화를 끌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투자기업에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이들 해외 연기금들은 여성 임원의 선임 등 이사회 구성원의 다양성 추구를 요구하거나 책임투자 관련 공시 확대를 요구하는 등 책임투자와 관련된 주주관여 활동을 펼치고 있다.

◇ 경영계 '기업 발목잡기'라며 반발

국민연금은 주주 활동이 자의적으로 결정되지 않도록 원칙과 기준, 절차를 투명하게 규정한 가이드라인 시행으로 자본시장의 예측 가능성과 대외 신뢰도를 한 단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경영간섭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경영계를 설득하는 힘겨운 과제를 안게 됐다.

기금운용위 위원장인 박능후 장관은 "국민연금이 만들고자 하는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의 주된 취지는 기업 경영에 개입하거나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며, 기업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기업 가치를 높이고 주주가치를 제고해 국민연금의 수익성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경영계는 "특정 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경영개입은 그 자체로 시장에 부정적 시그널을 줄 가능성이 크고 기업 경영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개연성이 높다"며 강력한 유감을 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보도자료에서 "경영계는 공적 연기금인 국민연금이 주 수입 원천인 기업을 압박하는 데 앞장서게 된 점에 참담함을 느낀다"며 "'국민 노후생활 보장'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따라 경영 중립적 투자 결정을 통한 수익률 제고에 충실해 주길 바란다"고 지적했다.전국경제인연합회도 "국민연금의 기업경영 개입과 지배구조 간섭이 늘면 신산업 진출과 일자리 창출에 매진해야 할 기업들의 경영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고, 결국 우리 경제의 활력도 잃게 될 것"이라며 "국민의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오늘 통과된 가이드라인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