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의 컬처 insight] 동백꽃 필 무렵·펭수·'플렉스'…2019 나를 찾아 떠난 여행

치열해진 경쟁 사회속에서
놓쳐버린 '나'를 찾는 대중들
'여행의 이유' 등 에세이 인기
시청률 23%를 기록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KBS 제공
“남들이 줄 세우는 표는 아무리 올려다 봐도 답이 없더라고요. 어차피 답도 없는데 거기 줄 서면 뭐해요. 오케이. 그건 니들 기준이고 내 점수는 내가 매긴다 하고 살아요.”

올 한 해 시청자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과 호평을 받은 드라마를 꼽자면 단연 KBS ‘동백꽃 필 무렵’일 것이다. 고아에 미혼모로 살아온 동백이는 처음엔 어딘가 주눅들어 보였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누구보다 당당하고 용기 있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아갔다. 동백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변호사 자영은 이런 말을 했다. “동백씨 마음엔 동백씨 꽃밭이 있네. 난 그 유명한 법대 간 사람인데 내 꽃밭이 없더라.” 동백이를 보며 많은 사람이 열광한 이유는 아마도 동백이가 가진 ‘나만의 꽃밭’ 때문이 아니었을까.‘동백꽃 필 무렵’뿐만 아니다. 펭귄 캐릭터 ‘펭수’, 힙합 트렌드 ‘플렉스(flex)’ 등 2019년 한 해를 대표하는 콘텐츠 또는 문화 현상을 따라가 보면 대중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 수 있다. ‘나 자신’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는 캐릭터나 행위에 더 박수를 쳤다. 치열해진 세상에서 문득 놓쳐 버린 나를 그들을 통해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도 비슷한 현상은 있었다. 힐링, 위로, 욜로(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 가심비(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 형태) 등이 유행처럼 퍼져 나갔다. 이런 문화·소비 트렌드 또한 나를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 타인 혹은 물질이라는 외적인 요소에 의존하는 형태였다. 트렌드에 맞춰 해외여행도, 소비도 해봤다. 그러나 마음이 다 채워지지 않는 것은 정작 중요한 나 자신으로의 여행은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 한 해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대중은 자신 스스로를 파고드는 콘텐츠를 즐기며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했다. 올해를 뜨겁게 달군 ‘펭수’ 열풍도 나와 연결된다. 펭수는 단순히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사랑받은 게 아니다. 네티즌 사이에선 ‘펭수 명언’도 큰 화제가 됐다. 그 어록이 담긴 ‘펭수 다이어리’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펭수의 말을 곱씹어 보면 비결을 알 수 있다. “다 잘할 수 없어요. 펭수도 달리기는 조금 느립니다. 그래도 속상해 마세요. 잘하는 게 분명 있을 겁니다. 그걸 더 잘하면 돼요.”자신을 찾아가는 행위는 때로 과감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10~20대에서 빠르게 퍼져 나간 ‘플렉스’ 현상이 그렇다. 플렉스는 ‘근육에 힘을 주다’는 의미의 단어로 힙합계에선 ‘뽐내다, 과시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래퍼들이 으스대듯 자랑하는 것을 뜻한다. 플렉스가 명품을 소비하는 성향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핵심은 힙합 음악 자체에 있다. 래퍼들은 음악에 자신이 겪은 일과 일상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말하듯 담아낸다. 젊은 세대가 힙합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그라들지 않는 에세이 열풍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교보문고는 올해의 독서 트렌드로 ‘오나나나’를 꼽았다. ‘오롯이 나를 향한,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삶’이란 뜻이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분석에 따르면 올해 차트 1~3위가 전부 이런 내용을 담은 에세이였다. 1위는 소설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가 차지했다. 혜민 스님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김수현 작가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뒤를 이었다. 독특한 상상력이 담겼지만 다소 나와는 거리가 먼 소설보다 현재의 내 감정과 같이 걸음을 맞춰주는 에세이에 빠져든 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나’라는 낯선 여행지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나 스스로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제대로 여행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더 이상 이곳이 미지의 세계로 남지 않도록, 우리는 나만의 나침반이 돼 줄 콘텐츠를 찾아 나선 것일지 모른다.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