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한국 투자하려던 솔베이…규제에 놀라 싱가포르行

기업하기 힘든 나라
(3) 한국 외면하는 외국기업

첨단소재 특수 폴리머 공장
화관법 등 부담에 발길 돌려
디미트리스 실라키스 주한유럽상공회의소(ECCK) 회장(앞줄 왼쪽 두 번째)이 지난달 29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ECCK 백서 2019’ 발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ECCK는 이날 화학물질 중복 규제 등 한국만의 독특한 규제 180건을 개선해달라고 정부에 건의했다. /한경DB
지난 3월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방한한 일함 카드리 솔베이 최고경영자(CEO)를 찾아갔다. 솔베이의 신제품 ‘특수 폴리머’ 파일럿 공장을 한국에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1863년 벨기에에 설립된 솔베이는 자동차 등에 들어가는 특수소재 분야 세계 1위 기업이다. 2016년 1200억원을 들여 새만금에 공장을 지을 정도로 한국 투자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최근 솔베이 본사는 싱가포르에 공장을 짓기로 했다. 외국계 기업 관계자는 29일 “솔베이 경영진이 한국에서 강화되고 있는 화학물질 규제와 주 52시간 근로제 등에 부담을 느껴 싱가포르행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외국 기업들이 한국을 외면하고 있다. 우수한 인적 자원과 산업 인프라 등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기업하기 힘든 나라’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어서다. 가파른 인건비 상승과 기업 규제 강화 등으로 경영 불확실성이 높아진 영향이 크다. 올해엔 외국 기업 조세감면이 폐지되면서 ‘당근책’마저 사라졌다.

한국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는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올 3분기 누적 FDI는 134억85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9.8% 급감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업 규제가 점점 강화되면서 한국이 투자처로서의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EU보다 센 환경·주52시간 압박
"규제 소나기 펀치 맞는듯"

산업용 접착제를 생산하는 유럽계 화학기업 P사는 한국 투자 계획을 최근 백지화했다. 한국에 생산 거점을 조성하면 물류비를 20% 정도 아낄 수 있었지만 최종 단계에서 베트남을 낙점했다. 강화되고 있는 화학물질 관련 규제가 발목을 잡았다. 주 52시간 근로제와 입김이 세지고 있는 강성 노조도 부담 요인이었다.한국을 외면하는 외국 기업이 늘고 있다. 과도한 기업 규제와 경직된 노동시장, 반기업 정서 확산 등의 영향이 크다. 싱가포르 등 경쟁국은 외국 기업 유치를 위해 파격적인 혜택을 제시하는 데 비해 한국은 있는 혜택마저 없애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외국계 기업 사장은 “계속 생기는 규제 때문에 ‘소나기 펀치’를 얻어맞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해하기 힘든 규제 많다”한국 투자 기피 현상은 통계로 확인된다. 29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 들어 3분기까지 제조업 외국인직접투자(FDI·신고 기준)는 34억7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전년 동기(83억7800만달러) 대비 58.7% 급감했다. FDI는 한국과의 지속적인 경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투자로 받아들여진다.

외국 기업은 자국보다 강한 규제가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걸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화학물질관리 규제는 세계 최고 수준인 유럽연합(EU)보다 엄격하다. 화학물질 등록 규제가 좋은 사례다. 한국에선 새로 들여온 연구개발(R&D)용 화학물질에 신규 성분이 1㎎이라도 들어 있으면 정부에 ‘등록면제확인’을 받아야 한다. 유럽은 1t 미만 R&D용 물질에 대해선 규제하지 않는다. 관리 대상도 폭넓다. 한국 화관법의 관리대상물질은 세계 최고 수준인 1940종이다. 독일 기업 관계자는 “과도한 화학물질 관리 부담은 소재·부품산업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외국인 시각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규제도 적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 외국계 기업 사장은 화관법 심사 때 지방자치단체에 제출하는 ‘등기이사 개인정보’를 사례로 들었다. 전과 조회 및 여권 정보 등을 제출해야 하는 지방환경청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다”고 꼬집었다.중복 규제로 ‘이중 비용’이 든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수입차업계에선 이산화탄소 배출량 주행 테스트가 자주 거론된다. 예컨대 독일의 5만㎞ 기준 이산화탄소 배출량 주행 테스트를 통과해도 한국에서 2만㎞ 기준으로 다시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시장 경직성도 부담

경직된 노동시장도 외국 기업의 발걸음을 다른 나라로 옮기게 하는 요인으로 평가된다. 주 52시간 근로제에 대해선 ‘유연성 있는 적용이 필요하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미국은 주 40시간 근로제를 시행 중이지만 초과 근무에 대해선 기업과 근로자가 ‘단체협약’으로 정할 수 있다. EU는 주 평균 48시간 근로가 원칙이지만 ‘근로자가 원하면 초과 근무가 가능하다’는 예외규정이 있다.

주 52시간제 때문에 외국 기업의 약 99%인 중소업체의 인력 수급이 더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최근 2년간 가파르게 오른 최저임금 역시 중소 외국 기업 인력난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 외국 기업 관계자는 “주 52시간 근로제 중소기업 적용이 1년 유예됐다고 해도 결국 사람을 더 뽑아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라고 털어놨다.

외국 기업과 소통해야

정부가 기업 관련 규제를 신설하거나 혜택을 없앨 때 외국 기업과 소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큰 문제란 비판도 있다. 외국인투자촉진법의 조세감면 혜택 폐지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정부는 신성장동력산업에 투자한 외국 기업 등에 최장 7년간 법인세·소득세를 감면해주던 제도를 올해부터 없앴다. ‘국내 기업과의 불평등’이 주요 이유였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국을 신규 투자 지역에서 제외하는 외국계 본사가 늘고 있다는 게 한국 지사 관계자의 전언이다. 올초 충남 천안공장 신설을 포기한 세계 3위 자동차부품 업체 콘티넨탈그룹이 대표적이다. 외국계 기업 고위관계자는 “규제 자체도 문제지만 여론에 따라 기업 규제가 오락가락하는 불확실성을 본사가 더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황정수/고재연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