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태의 데스크 시각] 가보지 않은 길

정종태 증권부장
조동철 금융통화위원은 한국은행 금통위에서 색깔이 가장 분명한 사람이다. 매파(통화 긴축론자)가 득세하는 금통위에서 대표적인 비둘기파(통화 완화론자)다. 총재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직설적 성격이어서 ‘까칠이’로 통한다.

조 위원은 올해 초 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대로 가면 올해 1% 성장률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성장과 거꾸로 가는 정책을 걱정하면서 했던 말로 기억된다. 당시 2%대 후반 성장률 전망이 대세였던 때라 “설마 그럴까요” 하고 말았다.그런 성장률 1%대가 결국 현실이 될 상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이다. 2%를 고수하던 경제부총리조차 목표 달성이 어렵다고 인정한 지난 19일 조 위원을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얘기를 했다. “성장률 1%대냐, 2%대냐는 한가한 얘기가 됐다. 정말 심각한 것은 명목성장률”이라고 했다.

"명목이 실질 밑도는 심각한 상황"

조 위원에 따르면 실질성장률에 물가를 더한 명목성장률은 올해 1%대 초반까지 떨어질 게 확실하다.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다. 보통은 물가가 플러스니 명목이 실질보다 높은 게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다. 명목이 실질을 밑도는 건 한국 경제에선 유례없는 일이다. 이유는 마이너스 물가다. 종합적인 물가를 보여주는 국내총생산(GDP)디플레이터(명목 GDP를 실질 GDP로 나눈 값)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내려가 있다.명목성장률이란 게 뭔가. 가계 기업 등 경제주체가 피부로 느끼는 성장률이다. 실제 호주머니에 얼마의 돈이 들어오냐를 의미한다. 명목이 실질보다 낮아졌다는 건 지표보다 국민이 체감하는 경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주열 한은 총재는 누누이 “명목이 실질을 밑돈다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했다.

명목성장률 하락은 기업들에 더더욱 치명적이다. 가계는 상대적으로 고통이 덜하다. 이른바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공적이전’ 소득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은 명목성장률 하락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조 위원 분석에 따르면 기업 소득 증가율을 명목으로 따지면 올해 -15%는 될 것이란 추정이 나온다고 한다. 영업으로 버는 소득은 급전직하로 떨어지는데, 세 부담은 오히려 늘고, 규제는 겹겹이 쌓이고…. 그야말로 악 소리 날 판이다.

규제 완화 등 정책 전환 서둘러야물가 하락은 소비 주체들엔 반가운 소식일지 모르지만 고착화되면 경제 전체로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기업 생산과 투자를 줄이고, 임금 고용 축소로 이어져 경제활력을 떨어뜨리는 ‘디플레 악순환’을 초래한다. 기업 수익성 악화는 세수 감소로 이어지고…, 그다음 수순은? 나라 경제의 파탄이다.

해법은 간단하다. 저물가에서 벗어나 경제가 활력을 되찾도록 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재정을 퍼붓는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다. 재정의 대부분은 비생산적이고 일회성인 곳으로 투입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돈이 생산적인 곳으로 흘러들어가도록 해야 활력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규제 완화를 비롯한 정책 대전환을 그토록 외치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가보지 않은 길로 접어들고 있다. 이틀 뒤 시작되는 새로운 10년은 더욱 알 수 없는 미로로 가득 찰 것이다. 이헌재 전 부총리는 이런 얘기를 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더 스마트한 대응을 요구받는데 50년 전 소셜리스트적 어프로치로 접근하면 미래 답이 안 나온다”고. 시장은 변화를 갈망하며 저 멀리 달아나는데, 집권 4년차에도 판박이 정책을 고수한다면? 머지않아 우리 경제는 막다른 길(dead end)에 부닥칠지 모른다.

jt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