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만찬] 김봉렬 한예종 총장 "나의 대학 시절…건축에 대한 심취와 야학 활동으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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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약속 장소를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위치한 아라리오 뮤지엄으로 잡았다. 국내 현대건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공간사옥’을 새 단장한 곳이다. 공간사옥은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으로 그가 창간한 건축잡지 ‘공간’의 사무실로 쓰였다. 건축을 전공한 김 총장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라 했다.
“24살 때 ‘공간’ 잡지에 한국 전통 건축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했습니다. 연재 글을 모아 잡지사에서 단행본도 출간해줬어요. 그렇게 나온 책이 김수근 선생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결정품입니다. 그때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할 때였는데, 책 덕분에 저는 ‘최연소 단행본 출간’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26살에 울산대 교수로 스카우트되기도 했죠. 그리고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된 거죠. 공간 잡지에 글을 연재하며 수시로 오가던 이곳이 저에게는 사회생활 출발점이 된 셈입니다.”▶학원생 때부터 건축 잡지에 글을 연재했다니 놀랍습니다.
“대학원 재학 중 육개장(6개월 장교)이라 불리던 석사장교 제도가 갑자기 만들어졌다. 석사 이상의 학력이면 6개월만 근무 후 제대를 할 수 있는 특별 혜택이었다. 나는 서울대 자연계 대학원 특례 1기 출신이다. 6개월의 군 생활 중 2개월은 전방에서 보내는데 특정 임무가 없더라. 한국 건축에 관심이 많아 건축 가이드를 쓰기 시작했다. 제대 후 공간 기자로 있던 후배에게 그 내용을 말했고, 연재 요청이 오게 된 거다.”
▶그렇게 공간사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인가요.
“연재한 글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뒤 김수근 선생의 후계자인 장세양 선생에게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울산대 초임 교수 시절이었는데 둘이 낮에 소주 8병 이상을 마셨다. 나는 겨우 반병을 마시고 취했다. 이후 자주 만나며 끊임없이 자극을 주셨다. 공간지 편집권을 주기도 하시고 같이 여행도 다녔다. ‘일생을 후원할테니 너는 공부를 해라’라며 격려도 해주셨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여기 올 때마다 나의 일생을 열어준 김수근, 장세양 선생이 생각난다.”
▶집안 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나봅니다.
“혼자 대학을 마친 것도 기적이라 생각한다. 대학 때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고, 국가 지원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때문에 유학은 꿈도 못꿨다. 아버님이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머님이 벌어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나는 5형제 중 막내인데 부유한 집이 아니다보니 부모님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거의 방임 상태로 컸다고 봐도 된다. 그게 서운했던 것은 아니고 자유로워서 더 좋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스스로 커왔다.” ▶어린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남들과 다른 시선을 가졌다. 조금 삐딱하다 싶을 정도다. 항상 기존의 말을 의심하는 버릇이 있었고,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 신문을 즐겨보고, 중학생 때는 10월 유신이 터져 분개했다. 궁금한 게 생기면 바로 찾아보고 스스로 생각해보는 성향이 강했다. 중학교 담임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 분은 어떤 스승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지리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학생들에게 외국은 미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며 제3세계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셨다. 또한 책에 있는 것이 모두 정답은 아니며 그 이면을 볼 줄 알아야한다고 가르쳤다.”
▶명문고로 손꼽히는 경기고 출신이니 당연히 공부도 잘하셨을 것 같습니다.
“시험을 보고 고등학교에 갔던 마지막 세대다. 경기고 입학시험에 200문제가 출제됐는데 5개를 틀리면 간신히 합격, 6개를 틀리면 탈락이었다. 나는 2~3개 정도만 틀려 합격할 수 있었다. 그날 하루 시험을 잘 본 것이 나의 일생에 큰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싶다.” ▶학창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고등학교 입학 후 신문반에 들어갔다. 글 쓰는 것도 배우고 세상을 역전시켜 보는 습관을 들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한 번은 예산이 없어 신문을 못 찍고 있었는데, 지도 교사가 ‘선배들을 찾아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무작정 찾아가 만난 사람이 故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다. 그렇게 큰 집무실은 처음 가봤다. 왜 왔냐길래 ‘신문 좀 찍어주세요’라고 말했다. 껄껄 웃으며 직원을 불러 ‘얘들 신문 좀 찍어줘라’고 하시더라.”
▶신문반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대학은 건축과로 진학하셨습니다.
“고등학교 때 문과 대신 이과를 선택했다. 집에서는 법대를 가라며 문과를 택하라고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다들 좋다고 하는 일명 ‘출세길’을 선택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이과를 선택했는데 공부하다보니 나에게 맞지 않더라. 역사, 사회, 경제 등에는 관심이 많았는데 수학 성적은 바닥이었다. 그래서 대학을 진학할 때는 이과 대신 문과를 선택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과에서 문과로 전과를 하면 예비고사 점수를 꽤 크게 깎았다. 그럼 서울대 진학이 불가했다. 학교에서는 서울대를 많이 보내는 게 중요했다. 나는 상관없었지만 선생님과 부모님이 크게 반대했다. 결국 이과 진학으로 결정했고, 의대에 진학하라는 것에는 반발심이 들어 공대를 선택했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1학년 때부터 야학 활동을 했다. 고등학교 때 신문반 활동을 하던 동료들이 함께 했다. 노동운동 등에 관심 있던 것은 아니고 순수하게 불우청소년을 교육하고 그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하도록 돕자는 차원에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모임이다. 함께 야학 활동을 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검사도 나오고 노동운동가도 나온걸 보니 말이다. 진보, 보수 성향이 모두 모여 있었다.” ▶전공을 건축으로 선택한 것은 나중 일인가요.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할 수 있다. 가고 싶은 학과가 없어 고민하던 중 건축과를 발견했다. 친구가 ‘건축과는 수학과 화학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에 혹했던 것이다. 건축과에 가보니 나와 잘 맞는 전공이었다. 기계사, 전자사라는 것은 없지만 건축역사는 있다. 공학적 측면도 있지만 인문학에도 가깝고 예술적인 매력도 있다. 어느 한 곳에 속하지 않고 묘하게 경계에 머무르는 것 같아 좋았다.”
▶대학 때 건축의 매력에 완전히 빠지신 것 같습니다.
“옛날 건축은 다 좋다. 왜 좋을까 생각해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 없는 것은 소멸되기 때문이다. 가치 있고 좋은 것만 살아남는다. 그 시대에 어떻게 그런 훌륭한 것을 만들었을까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는데 지식은 발전하지만 지혜는 발전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예수나 석가의 이야기가 아직도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학 시절은 건축에 대한 심취와 야학 활동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꽤 잦았던 연애도 있다. 집안 환경 때문인지 늘 외로움이 있었다. 그것이 이성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 것 같다. 대부분 짝사랑으로 끝났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연애뿐만이 아니다. 과거에 쓴 책도 다시 보기 싫을 정도다. 미래는 불안하고, 과거는 부끄럽다.”
▶울산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고, 한예종으로 오셨습니다.
“울산대에서 12년을 재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학교에서는 보직을 시키려 하더라. 선배들을 보니 그렇게 되면 갈 길이 뻔했다. 울산 유지들과 어울리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교육감, 국회의원 출마로 이어지는 순서였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길이라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한예종에서 건축학과를 만든다며 함께하자는 제안이 왔고, 워낙 스타 교수들이 많으니 나는 조용히 내 공부를 할 수 있겠다 싶어 바로 결정했다. 하지만 막상 오니 교학처장 자리에 앉게 돼 당황스러웠다. 학교 교수 중 내가 수학을 제일 잘한다는 게 이유였다.”
▶교학처장, 기획처장을 거쳐 총장으로 취임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까이서 만나고 있는데, 지금의 청년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할까 말까 할 때는 하는 게 최선이란 얘길 해주고 싶다. 직장 생활을 하던 중에 여행을 떠나고 싶어 고민을 하는 친구들 중 대부분은 여행을 포기한다. 하지만 나는 가라고 말하고 싶다. 고민한다는 것은 이미 반 이상 마음이 움직였다는 거다. 하고 싶지 않은 건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자기 마음이 원하는 것을 찾아가면 또 다른 길이 나온다. 우리 앞에는 한 두 개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길 바란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인가요.
“나는 늘 마음이 가는 쪽을 선택했다. 법대가 싫어 공대를 택했고, 야학이나 신문반도 계산 없이 그저 하고 싶은 마음을 따랐다. 그때그때 좋아하는 것을 선택했을 뿐 미래를 계획하거나 ‘무엇이 될까’를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면 결과에 만족하지 못할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는다.”
잡앤조이 박해나 기자 phn0905@hankyung.com
“24살 때 ‘공간’ 잡지에 한국 전통 건축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했습니다. 연재 글을 모아 잡지사에서 단행본도 출간해줬어요. 그렇게 나온 책이 김수근 선생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결정품입니다. 그때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할 때였는데, 책 덕분에 저는 ‘최연소 단행본 출간’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26살에 울산대 교수로 스카우트되기도 했죠. 그리고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된 거죠. 공간 잡지에 글을 연재하며 수시로 오가던 이곳이 저에게는 사회생활 출발점이 된 셈입니다.”▶학원생 때부터 건축 잡지에 글을 연재했다니 놀랍습니다.
“대학원 재학 중 육개장(6개월 장교)이라 불리던 석사장교 제도가 갑자기 만들어졌다. 석사 이상의 학력이면 6개월만 근무 후 제대를 할 수 있는 특별 혜택이었다. 나는 서울대 자연계 대학원 특례 1기 출신이다. 6개월의 군 생활 중 2개월은 전방에서 보내는데 특정 임무가 없더라. 한국 건축에 관심이 많아 건축 가이드를 쓰기 시작했다. 제대 후 공간 기자로 있던 후배에게 그 내용을 말했고, 연재 요청이 오게 된 거다.”
▶그렇게 공간사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인가요.
“연재한 글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뒤 김수근 선생의 후계자인 장세양 선생에게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울산대 초임 교수 시절이었는데 둘이 낮에 소주 8병 이상을 마셨다. 나는 겨우 반병을 마시고 취했다. 이후 자주 만나며 끊임없이 자극을 주셨다. 공간지 편집권을 주기도 하시고 같이 여행도 다녔다. ‘일생을 후원할테니 너는 공부를 해라’라며 격려도 해주셨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여기 올 때마다 나의 일생을 열어준 김수근, 장세양 선생이 생각난다.”
▶집안 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나봅니다.
“혼자 대학을 마친 것도 기적이라 생각한다. 대학 때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고, 국가 지원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때문에 유학은 꿈도 못꿨다. 아버님이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머님이 벌어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나는 5형제 중 막내인데 부유한 집이 아니다보니 부모님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거의 방임 상태로 컸다고 봐도 된다. 그게 서운했던 것은 아니고 자유로워서 더 좋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스스로 커왔다.” ▶어린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남들과 다른 시선을 가졌다. 조금 삐딱하다 싶을 정도다. 항상 기존의 말을 의심하는 버릇이 있었고,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 신문을 즐겨보고, 중학생 때는 10월 유신이 터져 분개했다. 궁금한 게 생기면 바로 찾아보고 스스로 생각해보는 성향이 강했다. 중학교 담임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 분은 어떤 스승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지리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학생들에게 외국은 미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며 제3세계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셨다. 또한 책에 있는 것이 모두 정답은 아니며 그 이면을 볼 줄 알아야한다고 가르쳤다.”
▶명문고로 손꼽히는 경기고 출신이니 당연히 공부도 잘하셨을 것 같습니다.
“시험을 보고 고등학교에 갔던 마지막 세대다. 경기고 입학시험에 200문제가 출제됐는데 5개를 틀리면 간신히 합격, 6개를 틀리면 탈락이었다. 나는 2~3개 정도만 틀려 합격할 수 있었다. 그날 하루 시험을 잘 본 것이 나의 일생에 큰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싶다.” ▶학창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고등학교 입학 후 신문반에 들어갔다. 글 쓰는 것도 배우고 세상을 역전시켜 보는 습관을 들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한 번은 예산이 없어 신문을 못 찍고 있었는데, 지도 교사가 ‘선배들을 찾아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무작정 찾아가 만난 사람이 故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다. 그렇게 큰 집무실은 처음 가봤다. 왜 왔냐길래 ‘신문 좀 찍어주세요’라고 말했다. 껄껄 웃으며 직원을 불러 ‘얘들 신문 좀 찍어줘라’고 하시더라.”
▶신문반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대학은 건축과로 진학하셨습니다.
“고등학교 때 문과 대신 이과를 선택했다. 집에서는 법대를 가라며 문과를 택하라고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다들 좋다고 하는 일명 ‘출세길’을 선택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이과를 선택했는데 공부하다보니 나에게 맞지 않더라. 역사, 사회, 경제 등에는 관심이 많았는데 수학 성적은 바닥이었다. 그래서 대학을 진학할 때는 이과 대신 문과를 선택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과에서 문과로 전과를 하면 예비고사 점수를 꽤 크게 깎았다. 그럼 서울대 진학이 불가했다. 학교에서는 서울대를 많이 보내는 게 중요했다. 나는 상관없었지만 선생님과 부모님이 크게 반대했다. 결국 이과 진학으로 결정했고, 의대에 진학하라는 것에는 반발심이 들어 공대를 선택했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1학년 때부터 야학 활동을 했다. 고등학교 때 신문반 활동을 하던 동료들이 함께 했다. 노동운동 등에 관심 있던 것은 아니고 순수하게 불우청소년을 교육하고 그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하도록 돕자는 차원에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모임이다. 함께 야학 활동을 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검사도 나오고 노동운동가도 나온걸 보니 말이다. 진보, 보수 성향이 모두 모여 있었다.” ▶전공을 건축으로 선택한 것은 나중 일인가요.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할 수 있다. 가고 싶은 학과가 없어 고민하던 중 건축과를 발견했다. 친구가 ‘건축과는 수학과 화학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에 혹했던 것이다. 건축과에 가보니 나와 잘 맞는 전공이었다. 기계사, 전자사라는 것은 없지만 건축역사는 있다. 공학적 측면도 있지만 인문학에도 가깝고 예술적인 매력도 있다. 어느 한 곳에 속하지 않고 묘하게 경계에 머무르는 것 같아 좋았다.”
▶대학 때 건축의 매력에 완전히 빠지신 것 같습니다.
“옛날 건축은 다 좋다. 왜 좋을까 생각해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 없는 것은 소멸되기 때문이다. 가치 있고 좋은 것만 살아남는다. 그 시대에 어떻게 그런 훌륭한 것을 만들었을까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는데 지식은 발전하지만 지혜는 발전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예수나 석가의 이야기가 아직도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학 시절은 건축에 대한 심취와 야학 활동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꽤 잦았던 연애도 있다. 집안 환경 때문인지 늘 외로움이 있었다. 그것이 이성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 것 같다. 대부분 짝사랑으로 끝났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연애뿐만이 아니다. 과거에 쓴 책도 다시 보기 싫을 정도다. 미래는 불안하고, 과거는 부끄럽다.”
▶울산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고, 한예종으로 오셨습니다.
“울산대에서 12년을 재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학교에서는 보직을 시키려 하더라. 선배들을 보니 그렇게 되면 갈 길이 뻔했다. 울산 유지들과 어울리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교육감, 국회의원 출마로 이어지는 순서였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길이라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한예종에서 건축학과를 만든다며 함께하자는 제안이 왔고, 워낙 스타 교수들이 많으니 나는 조용히 내 공부를 할 수 있겠다 싶어 바로 결정했다. 하지만 막상 오니 교학처장 자리에 앉게 돼 당황스러웠다. 학교 교수 중 내가 수학을 제일 잘한다는 게 이유였다.”
▶교학처장, 기획처장을 거쳐 총장으로 취임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까이서 만나고 있는데, 지금의 청년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할까 말까 할 때는 하는 게 최선이란 얘길 해주고 싶다. 직장 생활을 하던 중에 여행을 떠나고 싶어 고민을 하는 친구들 중 대부분은 여행을 포기한다. 하지만 나는 가라고 말하고 싶다. 고민한다는 것은 이미 반 이상 마음이 움직였다는 거다. 하고 싶지 않은 건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자기 마음이 원하는 것을 찾아가면 또 다른 길이 나온다. 우리 앞에는 한 두 개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길 바란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인가요.
“나는 늘 마음이 가는 쪽을 선택했다. 법대가 싫어 공대를 택했고, 야학이나 신문반도 계산 없이 그저 하고 싶은 마음을 따랐다. 그때그때 좋아하는 것을 선택했을 뿐 미래를 계획하거나 ‘무엇이 될까’를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면 결과에 만족하지 못할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는다.”
잡앤조이 박해나 기자 phn09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