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우산국, 동해 항로 '항해 물표' 역할…대마국과 해양·무역권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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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동해의 해양소국, 우산국우리 역사에는 육지의 나라만 있지는 않았다. ‘해중지(海中地)’, 즉 물의 나라, 섬의 나라도 있다. 사료에는 동해의 우산국, 남해의 탐라국과 대마국, 서해의 대석삭국(강화도)과 소석삭국(교동도)만 나온다. 하지만 랴오둥반도의 동남쪽 아래인 장산군도, 경기만 바깥의 백령도를 비롯한 연평군도, 덕적군도, 또 흑산군도에도 소국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동해로 나선 사람들
주변 강국의 간섭·침략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
동해 유일의 섬, 울릉도해가 처음 떠오르는 동해는 남북 길이가 1700㎞, 동서 최대 너비는 1000여㎞, 면적은 107만㎢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타타르 해협’까지 포함한 것이다. 이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하나뿐인 섬이 72.6㎢ 면적의 울릉도다. 1032년 ‘우산국주’가 아니라 ‘우릉성주’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우산국(于山國)이었지만, 이후에는 무릉(武陵), 우릉(羽陵), 우릉도(芋陵島 또는 于陵島, 羽陵島), 우릉성(羽陵城), 독섬 등으로 불렸다. 울릉도에서 88㎞ 떨어진 독도는 ‘새끼섬’이다. 생산활동의 중요한 영역이고 피항하거나 항로를 관측하는 데 절대적인 생활공동체다. 《만기요람》 《증보문헌비고》 등도 ‘울릉(鬱陵) 우산(于山)은 모두 우산국의 땅이다’라고 하나의 역사적 영토로 규정했다.
육지에서 울릉도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울진에서 159㎞, 강릉에서 178㎞, 삼척에서 161㎞, 포항에서 217㎞다. 《삼국유사》에는 ‘하슬라주(지금의 강릉)의 바다에서 바람을 타고 2일 정도 가면 우릉도(于陵島)가 있는데, 주변이 2만6730보이다’라고 기록돼 있다.하지만 선사시대에도 사람들은 동해를 건넜다. 섬 안에서 기원전 300년께의 무문토기들이 출토됐고, 1998년에는 고인돌, 선돌 등 제사 유적지들이 발견됐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울릉도와 교류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들도 있다. 《삼국지》·동이전 동옥저에는 동예(동해북부 해안) 사람들이 바다표범 가죽을 고구려에 바쳤으며, 먼 바다까지 항해했다고 나와 있다. 또 245년 고구려 동천왕을 추격하던 왕기(위나라 관리)가 노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수십일간 표류하다 큰 바다 가운데 섬에 닿았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바다 가운데 한 나라가 있는데 오로지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그 여인국은 어디일까? 쿠릴섬(사할린섬), 니가타 앞 사도(佐島)섬, 그리고 울릉도(이병도 설, 이케우치 히로 설)라는 설들이 있다. 물론 확정된 것은 없지만, 그 무렵 동해 원양까지 어업을 한 사실들은 인정한 것이다.
군사력 보유했지만 신라에 복속울릉도가 역사상 중요한 위치로 부상한 시기는 5세기다. 고구려는 400년에 광개토태왕이 신라의 구원 요청을 구실로 동해남부 연안까지 군대를 파견해 신라를 압박했다. 이후 두 나라는 동해중부 해안에서 자주 충돌했으나, 5세기 말에는 강릉, 삼척, 울진까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됐다. 일본열도로 진출하는 고구려로서는 중간 거점인 울릉도와 독도를 항해 물표로 활용하면 안정성이 높을 뿐 아니라, 동해중부 횡단항로를 사용할 수 있어 항해거리가 짧아진다. 고구려가 516년, 540년에 각각 왜국에 파견한 사신단은 동해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신라는 6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력이 강해져 북진정책을 취하고, 실직주(삼척)를 설치한 뒤 김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했다(이사부는 신라 왕족이었으며, 성이 김씨였기에 ‘김이사부’라 일컫는 게 합당하다).신라는 울릉도·독도와 주변 해역을 영토로 삼은 우산국을 복속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김이사부는 512년 하슬라주 군주로 옮긴 후 전쟁준비를 마쳤다. 그러고는 파도가 잔잔해지는 음력 6월에 수군을 동원해 동해를 건넜다. 그는 우산국 사람들이 사납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쉽게 항복시킬 수 있는 꾀를 냈다. 즉 나무로 사자(목우사자)를 많이 만들어 함선에 싣고 접근한 뒤,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무시무시한 광경을 처음 본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곧 항복했다. 이 나무사자들이 불교의 힘을 상징한 것인지, 독특한 전함을 의미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신라는 왜와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전함들을 수리한 기록도 있으며(467년), 병선을 병부에서 직접 관리했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하면 ‘목우사자’는 신형 전함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전해주는 이야기도 있다. 우산국은 작지만 바다에서는 힘이 셌고, 우해왕은 기운이 장사였다. 대마도의 왜구들이 우산국을 노략질하자 우해왕은 수군으로 원정을 감행했다. 겁먹은 대마국왕은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셋째 딸인 풍미녀를 바쳤다. 우해왕은 왕비로 삼은 풍미녀의 변덕과 사치를 위해 신라까지 노략질했으며, 정치를 게을리했다. 심지어는 신라가 공격한다는 정보를 보고한 신하까지 바다에 처넣었다. 섬사람들은 풍미녀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근심에 빠졌다. 결국 몇 해 뒤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울릉문화》).
비록 설화지만, 우산국이 단순한 어민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동해의 해양소국임을 알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해상권과 무역권을 놓고 동해와 남해에서 대마국과 충돌한 상황도 추측하게 한다. 실제로 그 무렵인 544년에는 연해주 해안에 살던 숙신인(여진 계통)들이 봄과 여름에 사도섬(니가타현)에서 어업을 했고, 이후에도 대화 없이 물건들을 교환하는 ‘침묵교역’도 벌였다(《일본서기》). 동해에서도 원양항해가 활발했던 것이다.
해양전략적 가치 큰 요충지
그 뒤 신라는 동해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진흥왕은 북진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우산국은 해양전략적인 가치가 컸다. 항복한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지만 해양문화의 메커니즘과 국제환경을 고려한다면 정치적인 힘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섬의 북쪽과 남쪽에는 6세기 중엽부터 만든 100여 기의 돌무덤이 남아 있다. 경상도의 영향을 받은 ‘울릉도식’이고, 안에서는 유리옥(금동 혁대장식) 등의 유물들이 발굴됐다.
발해인들은 727년부터 200여 년 동안 일본국에 공식 사절만 34번 파견했다. 동해북부 사단항로나 동해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할 때는 울릉도와 독도를 중간 물표로 삼았을 것이다. 그 후 동여진 해적들이 동해 해안의 일부 지방과 울릉도까지 점령하는 상황이 되면서 고려 정부는 공도(空島)정책을 취했다. 이 때문에 울릉도는 12세기부터 약 200년 동안 빈 섬이 됐다. 하지만 풍부한 수산물을 잡거나 너도밤나무 같은 목재로 배를 만드는 어업집단들, 물개나 해달의 모피 등을 무역하는 집단들은 비공식적으로 머물렀다. 그뿐만 아니라 항해하는 사람들은 피항, 급수, 식량 보급, 또는 해적소굴로 이용하기 위해 경유하거나 활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18세기 이후 강대국 패권 경쟁의 핵
오랫동안 역사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울릉도는 독도와 더불어 18세기 후반부터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과 연동돼 항로 문제, 군사적 가치, 자원 문제 등으로 전략적인 가치가 커졌다. 1787년에는 프랑스가 울릉도를 ‘다줄레섬’으로, 1849년에는 독도를 ‘리앙쿠르’로 명명했고, 러시아와 영국도 독도를 자기 식으로 불렀다. 이제 동해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조우하는 현장이 됐다. 울릉도와 독도는 동해 항로상의 경유지였고, 중핵이라는 상징성이 컸다. 당연히 러시아와 급성장한 일본은 사할린, 조선에 대한 영향권과 자원의 확보, 동아시아 주도권을 놓고 충돌을 시작했다.
일본은 울릉도에서 목재를 수입하는 데 실패하자 밀반출을 시도했고, 조선 정부는 1885년 목재 반환을 요청했다. 한편 러시아는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할아버지인 브리너가 세운 ‘조선삼림회사’를 통해 1896년 울릉도의 목재 채벌권을 따냈다. 결국 1904년 2월 4일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울릉도와 독도에 군사시설을 설치했던 일본은 울릉도 해전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을 선언했다.옛 우산국의 영역에서 일본 러시아 중국 심지어는 미국까지 가세해 영향력을 확장했었다(윤명철, 《우산국, 울릉도와 독도의 나라》).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