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숫자'만 보여준 대통령 신년사

현장에서

수출·일자리·국민안전 등
나쁜지표 외면한 채 자화자찬

고경봉 경제부 기자
“신남방 지역 수출 비중이 처음으로 20%를 돌파했습니다. 수출 시장이 다변화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신년사에서 지난해 수출 성과를 설명하며 언급한 대목이다. 주요국에 대한 과도한 수출 의존도가 줄고 수출 지역이 확대된다는 뉘앙스다. 하지만 신남방 지역 수출 비중이 커진 것은 이들 지역의 수출이 늘어서가 아니다.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인도 지역 수출은 오히려 3~5%가량 감소했다. 대신 중국, 유럽연합(EU) 등 다른 지역 수출이 더 많이 줄어든 바람에 이들 국가의 비중이 커진 것이다. 수출 상황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이 안일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작년 수출이 10년 만에 두 자릿수(10.3%) 감소했음에도 신년사에는 “새로운 수출 동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찬사만 담겼다.수출뿐만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신년사에 이례적으로 40여 개에 달하는 통계 지표를 인용했다. 하지만 자료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좋은 숫자만 ‘취사선택’했다는 의구심을 감추기 힘들다. 자살, 안전사고 등이 최근 1~2년 새 늘었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지만 줄어든 교통사고, 산업재해만 인용해 안전대책이 효과를 거뒀다거나, 미세먼지 악화 일수가 늘었다는 사실은 제쳐두고 연평균 미세먼지 농도만 놓고 ‘개선됐다’고 평가하는 식이다.

문 대통령은 일자리·복지 문제로 들어가서는 작심하듯 선별한 통계를 쏟아냈다. ‘역대 최고 고용률’ ‘13년 만에 최고의 청년 고용률’ 등을 언급하며 “일자리가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총평했다. 제조업의 ‘좋은 일자리’ 대신 ‘단기 알바’만 양산하고 있다는 시장 전문가들 지적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지난해 비정규직 근로자 수가 15년 만에 최대 수준으로 늘었다는 점도 외면했다. 심지어 노동계 싱크탱크인 한국노동사회연구소마저 며칠 전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영향으로 초단시간 근로자들이 늘어나고 저소득층 임금 증가율이 둔화됐다”고 했지만 대통령은 “기존 일자리 정책을 더 강하게 추진하겠다”고 했다.

신년사에선 “고용보험 가입자 수가 50만 명 이상 늘어 고용의 질도 개선됐다”고 했지만 지난해 실업자가 늘어 실업급여 지급액이 사상 최대로 늘었다는 점은 외면했다. 지난해 상위 20%의 평균 소득을 하위 20%의 평균 소득으로 나눈 값인 소득 5분위 배율이 줄어든 점을 들며 “포용 정책의 성과”라고 강조했지만 자산 격차가 더 벌어진 내용은 신년사 어디에도 없었다.정책은 진단에서 나온다. 지난해 경기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올해 경제 정책의 밑그림이 그려진다. 안 그래도 정부는 벌써부터 “포용·공정경제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올해는 재정 확대 등에 더 강한 드라이브를 걸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이 찬사 일색인 대통령의 경기 판단을 우려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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