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의 베트남은 지금] 베트남 '대박' 노리다 '쪽박' 찬 한국 의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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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외과 의사인 A씨는 ‘하노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지금도 오싹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엘도라도’를 꿈꾸며 베트남 파트너와 함께 하노이 도심에 클리닉을 개업했던 그는 불과 1년 여 만에 의료장비조차 제대로 갖고 나오지 못한 채 쫓기듯 하노이를 떠나고 말았다.
한국은 베트남 투자 1위국이다. 2018년 잠깐 중국에 1위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지난해 되찾았다. 한국의 베트남 투자가 양적으로는 계속 팽창하고 있음에도, 세부를 뜯어보면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인구 1억명의 베트남 내수 시장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대표적인 사례가 헬스케어 분야다. 꽤 많은 대학병원과 대형 민간병원들, 그리고 수많은 의사들이 베트남 진출에 공을 들였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노이에만해도 시장에 안착한 의사를 꼽을 때 다섯 손가락이 남을 정도다. 베트남 의료 분야는 제도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외국 의사들에게 ‘무주공산’에 가깝다. 의사 면허증만 있으면 베트남에서 간단한 영어 테스트만 거친 후 의사 활동을 할 수 있다. 베트남 의대생들도 졸업 후 전공의 수련 등의 과정조차 없이 바로 의사 면허가 주어진다. WHO(세계보건기구)가 경고할 정도로 진입장벽이 낮다보니, 베트남 시장은 해외 진출을 원하는 한국 의사들에게 제1의 대안지다. 조정래의 장편소설 『정글만리』속 성형외과의처럼, 무너진 한국에서의 삶을 이방인의 땅에서 보상받으려는 이들도 이젠 중국이 아닌 베트남으로 향한다. 호찌민에서 얼마 전 치러진 시험에 한국 의사들이 30여 명 응시했다.
베트남 정부도 외국계 병원과 의사들의 자국 진출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 국영병원 체제에서 국영과 민영 혼합체제로 전환 중인 베트남은 의료 기술과 시설의 선진화를 위해 헬스케어 분야에서도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고 있지만, 베트남 부유층들이 원정 의료로 해외에서 소비하는 돈이 연간 20억달러를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주요 대형 병원들도 이런 제안에 이끌려 하노이 당국자들과 수많은 MOU(양해각서)를 맺었다. 고위 관료들과 헬리콥터에 동승해 병원이 들어설 부지를 둘러보기도 했지만, MOU는 결국 완성되지 못한 서류로 남았다.
하노이와 호찌민에서 운영되고 있는 성형·피부 전문병원(KEANGNAM KOREA)의 대표 의사인 황기선 원장은 “진입 장벽이 낮아보이지만 막상 부딪히면 보이지 않는 각종 장애물들이 많다”며 “최소한 6개월이라도 하노이 생활을 직접 해보며 시장조사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 이런 일을 감수하지 않고 무작정 진출하는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의사 면허를 취득하는 것만해도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시험을 통과하는 건 쉽지만, 원하는 면허를 받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예컨데 성형외과 전문의에게 턱관절 수술을 할 수 있는 면허만 지급해주는 식이다. 이런 면허로 성형외과 병원을 열었다간 단속에 걸릴 수 밖에 없다. 무면허 의사로 낙인 찍히는 셈이다. 외국인에게 발급해주는 의사 면허를 세분화했다는 건 거쳐야 할 관(官)의 도장 수가 그 만큼 많다는 얘기다.
황 원장은 “의사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베트남과 한국의 문화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실패의 주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의대만 졸업해도 특별한 시험도 없고, 혹독한 전공의 수련 과정도 없이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거꾸로 의사라는 직업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다는 인식과 동일하다. 일종의 동전의 양면과 같다. 2010년대 이후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대형 병원에 대한 민간 자본의 투자가 쏟아지면서 의사 선호도가 올라가긴 했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 의사는 지식 노동자의 한 부류일 뿐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베트남의 민간 병원은 대부분 부동산 개발 업체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빈그룹이 설립한 빈멕이 대표적인 사례다. 빈그룹은 하노이와 호찌민에서 고층 빌딩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개발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얻은 회사로, 베트남 재계 1위다. 빈그룹 계열사인 빈홈은 아파트를 지을 때 단지 안에 빈멕을 입주시키는 방식으로 부동산 가치를 높인다. 빈그룹 계열의 대형 쇼핑몰인 빈컴몰에 CGV와 같은 영화관을 입주시키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황급히 하노이를 떠나야했던 A씨의 사례도 갈등의 시작은 파트너였던 건물주와의 관계에서 시작됐다. 현재 베트남 의료 시장은 과도기적 상황이다. 국·공립 병원이 제공하던 무상 의료에서 민영 병원 도입을 통한 유상 의료 시스템으로 전환하면서 각종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가장 우려스러운 건 대형 병원으로의 쏠림 현상이다. 하노이나 호찌민 같은 대도시의 국립병원들은 각지에서 몰려오는 환자들로 늘 인산인해다. 3시간 줄 서서 진료는 3분에 그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소셜라이징(socializing)이라는 명분으로 국립병원들이 민간 투자를 받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첨단 의료 장비를 갖춘 국립병원으로 사람이 몰리는 건 당연지사다. 대형 병원으로의 쏠림은 연쇄적으로 또 다른 부작용을 낳고 있다. 과잉 진료가 빈번하게 이뤄지는 터라 베트남의 건강보험은 최근 3년째 적자다. 농촌 지방의 보건소를 비롯해 군립, 도립 병원 등 1·2차 진료기관들이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점도 베트남 정부의 골치거리다.
베트남 정부는 의료 시장 민영화의 물결을 이대로 놔둘 수도, 그렇다고 무작정 막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민영화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매년 6~7%대의 경제 성장을 위해 인프라 건설 등 돈을 쏟아부을 곳이 산적해 있는 터라 의료 분야에 재정을 투입할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황 원장은 “현대아산병원처럼 산업자본과 의료 전문가가 결합된 한국의 의료 시스템을 통째로 베트남에 이식하는 게 최선의 진출 방법”이라며 “의사들이 개별적으로 나오는 식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한국은 베트남 투자 1위국이다. 2018년 잠깐 중국에 1위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지난해 되찾았다. 한국의 베트남 투자가 양적으로는 계속 팽창하고 있음에도, 세부를 뜯어보면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인구 1억명의 베트남 내수 시장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대표적인 사례가 헬스케어 분야다. 꽤 많은 대학병원과 대형 민간병원들, 그리고 수많은 의사들이 베트남 진출에 공을 들였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노이에만해도 시장에 안착한 의사를 꼽을 때 다섯 손가락이 남을 정도다. 베트남 의료 분야는 제도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외국 의사들에게 ‘무주공산’에 가깝다. 의사 면허증만 있으면 베트남에서 간단한 영어 테스트만 거친 후 의사 활동을 할 수 있다. 베트남 의대생들도 졸업 후 전공의 수련 등의 과정조차 없이 바로 의사 면허가 주어진다. WHO(세계보건기구)가 경고할 정도로 진입장벽이 낮다보니, 베트남 시장은 해외 진출을 원하는 한국 의사들에게 제1의 대안지다. 조정래의 장편소설 『정글만리』속 성형외과의처럼, 무너진 한국에서의 삶을 이방인의 땅에서 보상받으려는 이들도 이젠 중국이 아닌 베트남으로 향한다. 호찌민에서 얼마 전 치러진 시험에 한국 의사들이 30여 명 응시했다.
베트남 정부도 외국계 병원과 의사들의 자국 진출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 국영병원 체제에서 국영과 민영 혼합체제로 전환 중인 베트남은 의료 기술과 시설의 선진화를 위해 헬스케어 분야에서도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고 있지만, 베트남 부유층들이 원정 의료로 해외에서 소비하는 돈이 연간 20억달러를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주요 대형 병원들도 이런 제안에 이끌려 하노이 당국자들과 수많은 MOU(양해각서)를 맺었다. 고위 관료들과 헬리콥터에 동승해 병원이 들어설 부지를 둘러보기도 했지만, MOU는 결국 완성되지 못한 서류로 남았다.
하노이와 호찌민에서 운영되고 있는 성형·피부 전문병원(KEANGNAM KOREA)의 대표 의사인 황기선 원장은 “진입 장벽이 낮아보이지만 막상 부딪히면 보이지 않는 각종 장애물들이 많다”며 “최소한 6개월이라도 하노이 생활을 직접 해보며 시장조사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 이런 일을 감수하지 않고 무작정 진출하는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의사 면허를 취득하는 것만해도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시험을 통과하는 건 쉽지만, 원하는 면허를 받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예컨데 성형외과 전문의에게 턱관절 수술을 할 수 있는 면허만 지급해주는 식이다. 이런 면허로 성형외과 병원을 열었다간 단속에 걸릴 수 밖에 없다. 무면허 의사로 낙인 찍히는 셈이다. 외국인에게 발급해주는 의사 면허를 세분화했다는 건 거쳐야 할 관(官)의 도장 수가 그 만큼 많다는 얘기다.
황 원장은 “의사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베트남과 한국의 문화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실패의 주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의대만 졸업해도 특별한 시험도 없고, 혹독한 전공의 수련 과정도 없이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거꾸로 의사라는 직업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다는 인식과 동일하다. 일종의 동전의 양면과 같다. 2010년대 이후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대형 병원에 대한 민간 자본의 투자가 쏟아지면서 의사 선호도가 올라가긴 했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 의사는 지식 노동자의 한 부류일 뿐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베트남의 민간 병원은 대부분 부동산 개발 업체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빈그룹이 설립한 빈멕이 대표적인 사례다. 빈그룹은 하노이와 호찌민에서 고층 빌딩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개발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얻은 회사로, 베트남 재계 1위다. 빈그룹 계열사인 빈홈은 아파트를 지을 때 단지 안에 빈멕을 입주시키는 방식으로 부동산 가치를 높인다. 빈그룹 계열의 대형 쇼핑몰인 빈컴몰에 CGV와 같은 영화관을 입주시키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황급히 하노이를 떠나야했던 A씨의 사례도 갈등의 시작은 파트너였던 건물주와의 관계에서 시작됐다. 현재 베트남 의료 시장은 과도기적 상황이다. 국·공립 병원이 제공하던 무상 의료에서 민영 병원 도입을 통한 유상 의료 시스템으로 전환하면서 각종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가장 우려스러운 건 대형 병원으로의 쏠림 현상이다. 하노이나 호찌민 같은 대도시의 국립병원들은 각지에서 몰려오는 환자들로 늘 인산인해다. 3시간 줄 서서 진료는 3분에 그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소셜라이징(socializing)이라는 명분으로 국립병원들이 민간 투자를 받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첨단 의료 장비를 갖춘 국립병원으로 사람이 몰리는 건 당연지사다. 대형 병원으로의 쏠림은 연쇄적으로 또 다른 부작용을 낳고 있다. 과잉 진료가 빈번하게 이뤄지는 터라 베트남의 건강보험은 최근 3년째 적자다. 농촌 지방의 보건소를 비롯해 군립, 도립 병원 등 1·2차 진료기관들이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점도 베트남 정부의 골치거리다.
베트남 정부는 의료 시장 민영화의 물결을 이대로 놔둘 수도, 그렇다고 무작정 막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민영화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매년 6~7%대의 경제 성장을 위해 인프라 건설 등 돈을 쏟아부을 곳이 산적해 있는 터라 의료 분야에 재정을 투입할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황 원장은 “현대아산병원처럼 산업자본과 의료 전문가가 결합된 한국의 의료 시스템을 통째로 베트남에 이식하는 게 최선의 진출 방법”이라며 “의사들이 개별적으로 나오는 식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