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노조 판결이 부추긴 '노동계 줄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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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소송부터 걸고보자"노동사건을 전담하는 서울고등법원 민사38부는 ‘기업들의 무덤’으로 불린다. 대법원 판례를 뒤집고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인정 범위를 넓혔으며, SK그룹 계열사 간 근로자 전출을 불법파견이라고 판단하는 등 노동계에 우호적인 판결을 쏟아내고 있어서다. 서울고법 민사38부뿐만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전국 법원의 친노동 판결 추세가 뚜렷해지고 있다. 노동계가 반기는 판결이 늘면서 근로자들이 법원으로 몰려가고 있다.
文정부 들어 노동 소송 급증
작년 서울행정법원 접수 22%↑
기업들 "경영계만 고립무원"
9일 서울행정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노동 관련 소송은 전년보다 21.8% 늘어난 580건으로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3년 이후 가장 많았다. 행정법원의 노동 소송은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차인 2018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
행정법원은 지방노동위원회나 중앙노동위원회 결정에 불복한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웬만큼 굵직한 노동 사건은 모두 이곳으로 몰린다. 한 노무사는 “행정부와 사법부의 성향을 고려해 밑질 것 없다는 생각으로 일단 소송부터 걸고 보자는 분위기가 노동계에 팽배해 있다”고 말했다.
노조들이 앞다퉈 법정 싸움을 선택하는 것은 세력을 키우는 데 파업이나 시위보다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대규모 쟁의에 필요한 비용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사측을 압박할 수 있는 데다 승소하면 신규 노조원을 모으는 데도 유리하다. 김영환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은 “최근 법원 판결이 근로자와 노조 강화에 너무 치우쳐 기업들의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정책도 판결도 모두 '좌회전'…노조 무차별 소송에 떠는 기업들요즘 버스업계는 근로시간 관련 소송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 4월 대법원이 전세버스 운전기사의 대기시간은 온전한 휴게시간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결하면서다. 운전을 위해 대기 중인 기사들에게 많건 적건 임금을 줘야 한다는 얘기에 버스 노조들은 반색했다.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으로 월급이 줄어든 기사들이 늘어나자 상당수 노조는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임금 인상용 소송을 잇따라 제기했다.‘노동 경찰’ 근로감독관 대폭 증가
버스 노조뿐만 아니다. 회사를 상대로 한 노조의 소송은 모든 산업분야로 확산하고 있다. 9일 서울행정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노동사건 재판 건수는 580건으로 통계가 공개된 최근 7년 새 최다를 기록하기도 했다. 노조가 소송을 우선하는 배경은 파업이나 시위보다는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게 노동계가 이익을 극대화하고 세력을 키우는 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다.법조계에서는 주 52시간 근로제와 최저임금 인상, 엄격해진 근로자 파견 기준 등 외에 지방고용노동청의 근로감독관 증가도 노조의 소송전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판단한다. 근로감독관은 기업을 찾아다니며 최저임금 미지급, 임금체불, 근로시간 위반 등을 감시하는 ‘노동 경찰’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413명을 포함해 문재인 정부 들어 1187명 늘었다. 2016년 말에는 1694명이었다. 기업들은 근로감독관이 위법행위를 적발했을 때 소송을 진행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패소하면 비슷한 상황에 있는 노조들이 여기저기서 소송을 제기한다.
“소송은 노조 세력 확장에도 유리”
노조는 소송을 제기하는 게 근로조건 개선 외에 세력 확장에도 유리한 것으로 판단한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산하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은 최근 한 달여 만에 조합원이 100명 이상 늘어 2600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11월 15일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인 택배기사들도 노조를 만들 수 있다”는 서울행정법원의 판결 영향이다. 김태완 택배노조 위원장은 “지금까지 이렇게 빠르게 노조원이 증가한 적이 없었다”며 “판결을 계기로 설립됐지만 아직 상급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노조를 더하면 택배업계 노조원 증가 규모는 훨씬 클 것”이라고 말했다.노동소송에서 일단 승소하면 효과가 워낙 좋다 보니 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등은 자체 법률 지원 조직을 두고 통상임금, 퇴직금, 근로자지위 인정 소송 등을 지원하고 있다. 노동계 관계자는 “그동안 노조는 임금이나 근로조건과 관련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제일 먼저 ‘파업 카드’를 만지작거렸지만 이제는 소송을 먼저 해보는 게 트렌드가 됐다”며 “사측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파업보다 소송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높다는 게 대체적인 인식”이라고 말했다.
사측 “법원 판결에 노사 균형 상실”
법원이 노동계에 우호적인 판결을 내놓는 것도 노조의 소송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게 법조계와 산업계의 분석이다. 대법원은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이자 노동 변호사 출신인 김선수 대법관을 임명했다. 민주노총 출신 변호사를 근로 전담 재판연구관으로 처음 선발하기도 했다.
지난해 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육체근로자의 정년인 가동연한을 만 65세로 늘렸다. 노조가 통상임금을 재산정해 수당과 퇴직금을 소급 청구할 때 회사 경영난을 감안해야 한다는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 적용 요건도 까다롭게 했고, 개별 근로자의 동의 없이 취업 규칙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을 경우 무효라는 판결도 모두 ‘김명수 대법원’에서 나왔다.산업계에선 이번 정부 들어 노사 간 균형이 상실됐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영완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은 “최근 일부 법원 판결은 법리가 아니라 노조에 감정적으로 동조해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판결들이 회사 압박용으로 쓰이면서 기업의 법률 리스크가 가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연수/박상용/남정민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