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후] '니하오'로 한국 알리는 관광통역원 장문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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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기간 배운 중국어로 관광 안내…"덕분에 한국 사회 공부"
"탈북은 한순간이지만 정착은 마라톤…포기 말고 노력해야"
[※ 편집자 주 = 국내 정착 탈북민의 수가 3만명을 넘어 4만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정든 고향 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지만, 그들을 향한 국민의 시각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성장한 이들에게는 그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이 근저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온 대부분의 탈북민은 한국민으로 자리 잡기 위해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들보다 더 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여러 어려움을 딛고 국내에서 잘 정착해 한국민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는 숨겨진 탈북민의 '작은 성공' 사례를 발굴해 격주로 소개합니다.
] "중국어만 잘하면 될 줄 알았어요.
"
탈북민 장문혜(43)씨는 한국 도착 8개월만인 2014년 10월 서울시관광협회 관광통역안내원으로 취직했다.
북쪽에서 한국으로 오기 전 중국에서 10여년을 지내며 익히 '생존 중국어'로 관광객 안내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어를 한다고 이 일을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막 한국 땅을 밟아 외국인과 다름없었던 장씨는 기본적인 관광 정보조차 제공할 수 없었다.
북한에도 있는 수족관은 알았지만, 아쿠아리움이 뭔지, 코엑스가 뭐 하는 곳인지는 몰랐다.
'쁘티프랑스'(경기도 가평에 있는 프랑스 문화마을)로 가는 길을 묻는 관광객 앞에서는 마냥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나원(북한이탈주민이 입국한 뒤 사회적응 교육을 받는 기관)에서 나온 뒤로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학원과 집만 왔다 갔다 했지 어디 가보지를 않았어요.
지하철도 집이 있는 옥수역을 오가는 3호선밖에 몰랐습니다.
"
결국 입사 보름 만에 퇴사를 고민했지만, 북한을 탈출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긴 기억이 그녀를 붙잡았다.
비 내리는 밤 중국 국경을 넘어 라오스로 밀입국하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악몽은 지금도 생생하다.
비탈에서 미끄러진 뒤 일어나 정신을 차렸지만, 길 안내를 하던 브로커와 동료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중국 공안에 붙잡힐까 봐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밤새 산속을 헤맸다.
물과 음식이 없어 나뭇잎에 맺힌 이슬로 목을 축였고, 해가 뜨자 이슬마저 사라져 땅에 구멍을 파 고인 진흙 물을 마셨다.
'이러다 죽겠다'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무작정 중국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고 가까스로 일행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때의 공포를 지금의 어려움과 비교할 수 없었다.
다른 직장을 구하더라도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오기라고 해야 할까요.
그때도 그렇게 했는데 지금 내가 죽기 살기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봤는지, 죽든 살든 끝까지 가봤는지 반성했어요.
"
결심 뒤에 남은 건 노력.
쉬는 날이면 서울 시내 궁궐은 물론 남이섬과 가평 등 가까운 관광지를 답사하고 먼 곳은 책과 사진으로 공부했다.
죽기 살기로 달려들다 보니 3개월, 6개월, 1년이 지났고 어느새 신입 안내원 교육까지 맡게 됐다.
지금은 일이 참 재미있고 관광객이 고마워할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낀다.
"언어가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관광객에게 따뜻한 마음이 전달이 안 되는 기계적인 안내는 서비스가 아닙니다.
직업에 대한 흥미와 열의가 있어야 하죠."
지난 8일 명동예술극장 앞에서 근무 중인 장씨를 만났다.
장씨는 중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니하오'(안녕하십니까)라고 먼저 인사하며 다가갔다.
특정 브랜드 화장품을 찾는 중국인 가족을 위해 스마트폰을 검색하는가 하면 유명 간장게장 식당을 찾는 이들을 위해 지도를 펼쳤다.
미세먼지 마스크를 사려는 젊은 여자 3명을 중국어를 하는 직원이 있는 약국으로 안내했다.
간단한 안내는 협회에서 교육받은 대로 영어와 일본어로도 했다.
"이 일 덕분에 한국 사회에 빨리 적응하게 됐다고 생각해요.
일반 회사만 다녔으면 몰랐을 내용도 관광객을 안내하다 배우게 됐습니다.
" 장씨는 자신이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을 거쳐 오는 탈북민은 많지만, 모두 중국어를 잘하는 건 아니다.
장씨는 2001년 탈북했다.
국경에 사는 북한 주민들이 흔히 하는 밀수에 손을 댔다가 붙잡힐 위기에 처했고, 가족을 두고 홀로 탈출했다.
중국에 있는 먼 친척의 소개로 베이징의 식당에서 시작한 장씨는 이후 주유소, 의류공장, 호텔식당, 서점, 분식점 등 여러 일터를 전전했다.
빨리 돈을 벌어 생활하고 가족에 보내겠다는 생각만으로 살았고, 중국어는 생존을 위해 필요했다.
탈북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해질까 봐 사람을 피하다 보니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게 소일거리였다.
니하오도 몰랐던 중국어 실력은 5년이 지나자 웬만한 책과 신문을 보는 데 문제가 없었다.
먹고 사는 게 힘들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한으로 보내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한국행을 결심했다.
"공안 차량이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가도, 경비처럼 제복을 입은 사람만 봐도 너무 무서웠어요.
"
이제 어느 정도 한국에 안착한 장씨는 다른 탈북민에게 새로운 곳에서의 정착 과정은 마라톤이라고 조언한다.
"우리가 북한 국경을 넘는 데는 한두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이곳에서 정착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탈북할 때처럼 포기하지 말고 한발짝 두발짝 마라톤처럼 꾸준히 노력해야 다가갈 수 있습니다.
"
"저는 평범하게 안내사로 일하고 있지만 어떤 분은 더 대단한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어요.
어떤 일을 하든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내가 선택한 길에 재미를 느끼고 자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 /연합뉴스
"탈북은 한순간이지만 정착은 마라톤…포기 말고 노력해야"
[※ 편집자 주 = 국내 정착 탈북민의 수가 3만명을 넘어 4만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정든 고향 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지만, 그들을 향한 국민의 시각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성장한 이들에게는 그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이 근저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온 대부분의 탈북민은 한국민으로 자리 잡기 위해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들보다 더 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여러 어려움을 딛고 국내에서 잘 정착해 한국민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는 숨겨진 탈북민의 '작은 성공' 사례를 발굴해 격주로 소개합니다.
] "중국어만 잘하면 될 줄 알았어요.
"
탈북민 장문혜(43)씨는 한국 도착 8개월만인 2014년 10월 서울시관광협회 관광통역안내원으로 취직했다.
북쪽에서 한국으로 오기 전 중국에서 10여년을 지내며 익히 '생존 중국어'로 관광객 안내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어를 한다고 이 일을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막 한국 땅을 밟아 외국인과 다름없었던 장씨는 기본적인 관광 정보조차 제공할 수 없었다.
북한에도 있는 수족관은 알았지만, 아쿠아리움이 뭔지, 코엑스가 뭐 하는 곳인지는 몰랐다.
'쁘티프랑스'(경기도 가평에 있는 프랑스 문화마을)로 가는 길을 묻는 관광객 앞에서는 마냥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나원(북한이탈주민이 입국한 뒤 사회적응 교육을 받는 기관)에서 나온 뒤로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학원과 집만 왔다 갔다 했지 어디 가보지를 않았어요.
지하철도 집이 있는 옥수역을 오가는 3호선밖에 몰랐습니다.
"
결국 입사 보름 만에 퇴사를 고민했지만, 북한을 탈출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긴 기억이 그녀를 붙잡았다.
비 내리는 밤 중국 국경을 넘어 라오스로 밀입국하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악몽은 지금도 생생하다.
비탈에서 미끄러진 뒤 일어나 정신을 차렸지만, 길 안내를 하던 브로커와 동료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중국 공안에 붙잡힐까 봐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밤새 산속을 헤맸다.
물과 음식이 없어 나뭇잎에 맺힌 이슬로 목을 축였고, 해가 뜨자 이슬마저 사라져 땅에 구멍을 파 고인 진흙 물을 마셨다.
'이러다 죽겠다'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무작정 중국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고 가까스로 일행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때의 공포를 지금의 어려움과 비교할 수 없었다.
다른 직장을 구하더라도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오기라고 해야 할까요.
그때도 그렇게 했는데 지금 내가 죽기 살기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봤는지, 죽든 살든 끝까지 가봤는지 반성했어요.
"
결심 뒤에 남은 건 노력.
쉬는 날이면 서울 시내 궁궐은 물론 남이섬과 가평 등 가까운 관광지를 답사하고 먼 곳은 책과 사진으로 공부했다.
죽기 살기로 달려들다 보니 3개월, 6개월, 1년이 지났고 어느새 신입 안내원 교육까지 맡게 됐다.
지금은 일이 참 재미있고 관광객이 고마워할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낀다.
"언어가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관광객에게 따뜻한 마음이 전달이 안 되는 기계적인 안내는 서비스가 아닙니다.
직업에 대한 흥미와 열의가 있어야 하죠."
지난 8일 명동예술극장 앞에서 근무 중인 장씨를 만났다.
장씨는 중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니하오'(안녕하십니까)라고 먼저 인사하며 다가갔다.
특정 브랜드 화장품을 찾는 중국인 가족을 위해 스마트폰을 검색하는가 하면 유명 간장게장 식당을 찾는 이들을 위해 지도를 펼쳤다.
미세먼지 마스크를 사려는 젊은 여자 3명을 중국어를 하는 직원이 있는 약국으로 안내했다.
간단한 안내는 협회에서 교육받은 대로 영어와 일본어로도 했다.
"이 일 덕분에 한국 사회에 빨리 적응하게 됐다고 생각해요.
일반 회사만 다녔으면 몰랐을 내용도 관광객을 안내하다 배우게 됐습니다.
" 장씨는 자신이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을 거쳐 오는 탈북민은 많지만, 모두 중국어를 잘하는 건 아니다.
장씨는 2001년 탈북했다.
국경에 사는 북한 주민들이 흔히 하는 밀수에 손을 댔다가 붙잡힐 위기에 처했고, 가족을 두고 홀로 탈출했다.
중국에 있는 먼 친척의 소개로 베이징의 식당에서 시작한 장씨는 이후 주유소, 의류공장, 호텔식당, 서점, 분식점 등 여러 일터를 전전했다.
빨리 돈을 벌어 생활하고 가족에 보내겠다는 생각만으로 살았고, 중국어는 생존을 위해 필요했다.
탈북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해질까 봐 사람을 피하다 보니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게 소일거리였다.
니하오도 몰랐던 중국어 실력은 5년이 지나자 웬만한 책과 신문을 보는 데 문제가 없었다.
먹고 사는 게 힘들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한으로 보내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한국행을 결심했다.
"공안 차량이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가도, 경비처럼 제복을 입은 사람만 봐도 너무 무서웠어요.
"
이제 어느 정도 한국에 안착한 장씨는 다른 탈북민에게 새로운 곳에서의 정착 과정은 마라톤이라고 조언한다.
"우리가 북한 국경을 넘는 데는 한두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이곳에서 정착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탈북할 때처럼 포기하지 말고 한발짝 두발짝 마라톤처럼 꾸준히 노력해야 다가갈 수 있습니다.
"
"저는 평범하게 안내사로 일하고 있지만 어떤 분은 더 대단한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어요.
어떤 일을 하든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내가 선택한 길에 재미를 느끼고 자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