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의 베트남은 지금] '설 먹튀'에 골치 앓는 베트남 진출 기업들

정월 초하루를 뜻하는 ‘뗏(Tết)’은 베트남 최대 명절이다. 중국의 춘제 만큼이나 요란하고, 시끌벅적하다. 법정 휴일은 7일이지만, 설 연휴를 전후해 2~3주씩 휴가를 즐기는 이들도 꽤 많다. 음력 12월23일인 16일에 부엌의 신을 하늘로 보내는 차례를 지낸 뒤 관공서와 베트남 회사들 대부분이 휴무에 들어간다. 이 때가 되면, 공장이나 음식점에서 일하는 베트남의 평범한 근로자들은 ‘13월의 월급’을 받아들고 저마다 고향으로 향한다. 1980년대 한국의 모습 그대로다. 그 시절 서울 구로, 가리봉동에서 일하던 수많은 근로자들은 설 연휴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달력의 검은 날짜를 지우고 또 지웠다.

뗏 기간은 베트남에서 연중 소비가 가장 활발한 때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동안 아껴뒀던 돈을 아낌없이 쓴다. 한국에선 개인주의와 가족 공동체의 해체로 인해 설 풍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베트남은 설 차롓상만해도 나흘 동안 차린다. 소비의 대부분은 ‘마음의 정’을 담은 선물을 사는데 쓰인다. 첫 날엔 부모님, 형제 등 직계가족이 모여 선물을 주고 받고, 둘째날엔 동네에 모여 사는 친지들을 방문하고, 셋째날엔 스승이나 평소 고마워했던 사람을 찾아가고, 넷째날엔 친구들을 만나는 식이다. 나흘 내내 차례상엔 지전(紙錢)이 쌓이고, 서로 주고받은 선물이 방 한 가득 쌓일수록 뗏을 잘 치렀다는 증거다.

3모작이 가능한 농경사회인 베트남에서 뗏은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계절적 변화를 뜻하며, 이는 곧 새해 첫 번째 농사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베트남의 뗏 풍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들도 몇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게 돈 봉투 문화다. 회사원인 부이 흐엉 장은 “하노이 등 북부 지방에선 복숭아꽃이나 금귤(낑깡) 나무를 선물하고, 남부는 매화 나무를 선물하곤 한다”며 “예전엔 집에서 키운 닭을 가져가기도 했지만 요즘은 돈 봉투를 주고 받는 게 관례가 됐다”고 말했다. 지방 성(省)의 인민위원장이 관내 외국투자기업들을 초청해 봉투를 나눠주는 일은 베트남의 흔한 설 풍경이다. 직장에서도 사장이나 법인장이 직원들에게 작게는 5만동(약 2500원)에서 많게는 50만동(약 2만5000원)짜리 지폐가 담긴 봉투를 ‘뽑기 놀이’와 함께 선물로 주곤 한다.

새 출발을 의미하는 뗏은 이직이 가장 활발한 시기이기도 하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뗏 보너스만 챙긴 채 그만두는 직원들 때문에 곤란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외국인투자기업들이 물밀듯이 밀려들고, 덕분에 경제성장률이 매년 6~7%에 달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베트남 노동시장은 사실상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황이 됐다. 베트남 청년들 사이에선 ‘그랩 운전 기사를 해도 공장 다니는 것 만큼 돈 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베트남의 젊은 노동력들이 그랩 운전사와 같은 비생산적인 일터를 선호하기 시작하자, 베트남 관영매체들이 우려를 쏟아낼 정도다. 퇴직율이 가장 낮은 것으로 알려진 삼성전자 베트남복합단지조차 매일 500여 명의 신규 채용자 면접을 본다. 워낙 이직이 잦은 탓에 베트남 진출 한국 기업들 중에선 현지인 인사·노무 담당자에 휘둘리는 일도 발생한다. 한 기업 관계자는 “월급을 갑자기 두 배 올려달라고 해 울며겨자먹기로 수용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의 뗏 풍경이 한국, 중국의 설 연휴와 다른 것도 있다. 중국에서 춘윈이라고 부르고, 한국에선 민족 대이동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베트남에서도 있긴 하지만, 그 정도가 덜한 편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이촌향도 현상이 뚜렷했던 한·중과 달리 베트남은 농공 병진 정책을 추진하면서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을 최대한 억제했다. 중국만해도 2000년대 중반 무렵이 되면, ‘부유(浮流)인구’라고 불리는 대규모 농촌 인력들이 상하이 등 대도시로 물려들면서 각종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이들은 춘제가 되면 비행기, 열차, 버스, 트럭, 심지어 동네 경운기 뒷자리에 몸을 실은 채 고향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에 비해 베트남 근로자들은 오토바이크로 귀향할 수 있는 거리의 도시로 나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호찌민 출신이 하노이로 가는 일은 거의 없다는 얘기다.

이 같은 성향은 베트남 정부의 지방균형발전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북,중,남부에 산업단지를 고루 유치하면서 근로자들이 고향에서 멀리 가지 않아도 되게끔 경제 개발 전략을 펴고 있다는 얘기다. 북부만해도 산업단지가 126개에 달한다. 최근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중부엔 산업단지가 55개 들어서 있다. 남부는 동나이(35개), 빈즈엉(32개), 호찌민(21개) 등 182개의 산업단지가 조성돼 있다. 전국 각 성엔 해당 성을 대표하는 대학과 명문 고등학교들이 즐비하다. 베트남 전국에 260여 개의 매장을 운영 중인 롯데리아 관계자는 “베트남의 젊은 직원들도 대부분 고향 가까이에 있는 매장에서 근무하길 원한다”며 “대도시를 선호하는 한국과는 정서가 다르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국기업 관계자는 “베트남에 진출하는 기업 대부분이 호찌민이나 하노이 같은 대도시만 고려하는데 오히려 지방 중소 도시쪽이 근로자들의 이직률도 낮고, 향후 개발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