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美 헤지펀드 엘리엇, 현대車 지분 다 팔았다

경영 개입 선언 20개월 만에
기아차·모비스 주식도 매각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현대자동차 등 3사 지분을 전량 매각했다. 사진은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 한경DB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현대자동차그룹 보유 지분을 전량 매각하고 철수했다.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를 투입해 현대차 현대모비스 기아자동차 주식을 매입하고 경영 참여를 선언한 지 20개월 만이다. ‘엘리엇’이란 불확실성이 해소됨에 따라 현대차의 미래 사업과 지배구조 개편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22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엘리엇은 보유하던 현대차 지분 2.9%, 현대모비스 2.6%, 기아자동차 2.1%를 지난해 말 모두 팔았다. IB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말 폐쇄된 주주명부(폐쇄일 12월 26일)에서 엘리엇 이름이 사라진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엘리엇은 2018년 4월 대표 펀드인 엘리엇어소시에이츠와 자회사 포터캐피털을 통해 현대차그룹 핵심 3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어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간 합병을 요구하고, 8조3000억원에 달하는 초고배당을 제안하며 경영 개입을 본격화했다. 지난해 3월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주총회에서 엘리엇이 제안한 사외이사 선임과 배당 안건 등은 표 대결 끝에 모두 부결됐다. 엘리엇은 주총 표 싸움에서 패배한 뒤 “현대차의 발전을 위해 더 큰 역할을 하겠다”고 공언하면서 한편으론 퇴로를 모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올 주총에서 다시 표 대결을 벌이더라도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현대차 주가가 다소 오른 시기를 틈타 손실을 감수하고 팔아치웠다는 분석이다.
'엘리엇 리스크' 2년 만에 벗어난 현대차…'경영 불확실성' 걷혔다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 기아자동차 보유 주식을 전량 매각한 것은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게 투자은행(IB)업계의 분석이다. 추가 공격할 ‘명분’이 부족한 만큼 그동안의 투자 손실을 최소화해 ‘실리’를 챙기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앞두고 최대 악재였던 ‘엘리엇 리스크’를 털어낼 수 있게 됐다.2년 만에 백기 든 엘리엇

엘리엇이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에 갑자기 끼어든 건 2018년 4월 4일이다. 현대차그룹이 같은 해 3월 현대모비스의 일부 사업부문을 떼내 현대글로비스와 합병시키겠다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놓은 직후였다. 당시 엘리엇은 지배구조 개선 및 자본 관리 최적화, 주주환원 등에 대한 추가 조치를 요구했다. 엘리엇은 “현대차와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3개사의 보통주를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어치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엘리엇이 ‘탐색전’을 벌이는 것인지 ‘전면전’에 나선 건지 불분명했다.

‘본색’을 드러낸 건 보름쯤 지난 뒤였다. 같은 달 23일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를 합병한 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복잡한 지배구조를 간소화하라고 요구했다. 배당 확대 및 자사주 소각 등을 통한 주주환원 규모 확대도 주장했다.후폭풍은 작지 않았다. 현대차그룹은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 ISS 등 국내외 투자자들의 ‘반대’에 맞닥뜨렸다. 결국 같은 해 5월 29일로 잡았던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일부 사업부문 분할·합병을 위한 임시 주주총회를 전격 취소했다. 엘리엇에 발목이 잡히면서 주총 ‘표 대결’에서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해서다.

엘리엇은 같은 해 9월 추가 공세에 나섰다. 현대모비스를 애프터서비스(AS) 부문과 모듈·부품 부문으로 쪼개 각각 현대차,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라고 요구했다.

지난해 3월 주총을 앞두고선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주총에서 위임장 대결을 선언했다. 주주제안 형식으로 배당 규모를 확대하고, 자신들이 선정한 인물을 사외이사에 앉히라고 했다.‘2차전’ 결과는 달랐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완승’이었다. 주총에서 각사의 배당 및 사외이사 선임 안건은 모두 이사회 원안대로 통과됐다. 업계에선 엘리엇의 자승자박이란 평가가 나왔다. 엘리엇이 무리한 배당을 요구한 데다 이해상충 논란이 있는 인물을 사외이사로 앉히려다 시장의 반발을 샀다는 평가가 나왔다.

“명분·실리 없다고 판단한 듯”

지난해 주총에서 쓴맛을 본 엘리엇의 행보는 바뀌기 시작했다. 더 이상 표 대결을 통해 현대차그룹 계열사 주총에 영향력을 미치긴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분석이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돈’이었다. 엘리엇은 현대차 등 3개 계열사의 지분을 더 늘렸다가 주가 하락으로 큰 손실을 봤다. IB업계는 엘리엇이 한때 전체 투자금의 30%가량인 5000억원 안팎의 평가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대차 주가가 2018년 초엔 15만∼16만원대였는데 최근엔 12만원대 전후다.

IB업계 관계자는 “엘리엇이 끼어든 뒤 주당 9만원대까지 떨어졌던 현대차 주가가 최근 13만원 가까이 회복하면서 어느 정도 손실을 만회하자 철수를 결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엘리엇이 지난해 말 매각 당시 보유한 현대차, 현대모비스, 기아차 지분은 각각 2.9%, 2.6%, 2.1%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이 최근 미래 신사업 투자를 확대하고 비전을 구체화하면서 공격할 명분이 없어 지분을 뺀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엘리엇은 그동안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에 쌓여 있는 수조원의 이익잉여금을 기업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미래 먹거리를 찾거나 주주들에게 환원하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이 지난해 글로벌 톱3 자율주행 소프트웨어(SW)업체인 앱티브와 손잡고 2조4000억원을 투자해 합작사를 설립하기로 하는 등 적극적 행보에 나서면서 엘리엇으로선 ‘할 말’이 없게 됐다는 분석이다.

엘리엇이 철수하면서 그간 현대차그룹을 짓눌렀던 최대 악재가 해소됐다는 진단이 나온다. 엘리엇이 발을 빼면서 현대차그룹의 미래 신사업 투자에 속도가 더 붙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향후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탄력이 붙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이 중장기 투자와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앞두고 불확실성을 해소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채연/장창민/도병욱 기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