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박은하 주영국 대사, 역사학자 꿈꾸던 부산 소녀…그리스·로마사에 빠져 외교관 길

'BTS의 나라' 한국, 英서 호감
브렉시트도 韓기업에 새 기회
런던=강경민 특파원
박은하 주(駐)영국 대사(57)는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익숙한 외교관이다. 여성 최초 외무고시(19회) 수석 합격자인 박 대사는 2018년 8월 주영대사로 임명됐다. 외시 출신 여성 외교관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주재대사로 임명된 건 외교부 출범 이래 박 대사가 처음이었다. 박 대사는 ‘부부 외교관 1호’이기도 하다. 박 대사의 부군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측근이었던 김원수 전 유엔 사무차장 겸 군축고위대표(외시 12회)다.

‘맛있는 만남’ 인터뷰를 요청하자 박 대사는 즐겨 찾는 현지 음식점이 아니라 대사관저에서 식사를 함께하자고 했다. 런던 켄싱턴에 있는 대사관저는 원래 주영 대사관 건물이었다. 1995년부터 대사관저로 쓰이고 있다. 박 대사는 대사관저를 한식 등 한국 문화를 알리는 공공외교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런던에 한식당은 많지만 현지 VIP들이 한정식을 맛볼 수 있는 고급식당은 많지 않아요. 대사관저가 고급 한정식의 메카가 되면 한국 문화를 영국에 더 많이 알릴 수 있을 것 같아요.”역사학자 꿈꿨던 평범한 소녀

대사관저에서 준비한 음식은 한식 코스 요리. 밀전병 샐러드가 가장 먼저 나왔다. 밀전병과 함께 보리와 각종 과일, 채소를 곁들인 음식이었다. 이어 나온 요리는 수란채. 찌고 데친 각종 채소에 계란 반숙을 얹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1999년 방한 때 안동 하회마을에서 맛보고 감탄한 음식이다.

박 대사는 1962년 부산에서 1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은행에서 근무했던 부친 덕분에 가정 형편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부족하지도 않았다. 학창 시절 역시 평범했다. 박 대사의 학창 시절 꿈은 역사학자. 연세대 사학과에 입학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대학에 입학한 뒤 그리스·로마 역사와 문화 등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외교관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대학 졸업 1년 후 외무고시에 수석으로 운좋게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박 대사는 고시 공부를 할 때도 항상 외모와 옷차림에 신경썼다. “흔히 ‘고시생 패션’이라고 하죠. 하지만 전 오히려 옷차림에 더 신경썼습니다. 공부하러 갈 때도 일부러 옷을 차려입었죠.” 그래서일까. 박 대사는 지금도 영국 외교가에서 ‘패셔니스타’로 유명하다.

박 대사는 김경임 전 튀니지 대사(외시 12회), 백지아 제네바 대사(18회)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외시 합격자다. 1985년에 배치받은 첫 부서는 아프리카과. 여성 외교관이 외교부 전체에서 세 명에 불과하다 보니 웃지 못할 일화도 많았다고 했다. “다른 부서 간부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담당 사무관을 찾더라고요. 그래서 말씀하시라고 했더니 화를 내면서 ‘빨리 사무관 바꿔’라고 계속 얘기하는 거예요.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박 대사는 부서에 배치받은 뒤 여성 사무관이라는 사실을 이곳저곳에 알리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남편인 김 전 사무차장을 만난 건 이때였다. “선배인 남편은 북미과 서기관이었죠.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흑인인종차별정책)’가 글로벌 이슈가 될 때였습니다. 남편이 관련 자료를 요청해서 꼼꼼하게 챙겨줬습니다. 이때부터 인연이 돼서 비밀 연애를 시작했죠.”비밀 연애 후 첫 ‘부부 외교관’

대화를 이어가던 중 빨간색 고추장으로 버무린 바닷가재 요리가 나왔다. “인터뷰는 천천히 하고 일단 식사부터 합시다.” 식사 자리에 동석한 김 전 사무차장의 권유로 한 입 맛봤다. 외국인들에겐 다소 맵게 느껴질 수 있는 맛이었다. 박 대사는 고개를 저었다. “영국인들이 매운 음식을 못 먹는다는 건 편견입니다. 대사관저 메뉴 중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도 고추장으로 버무린 이 음식이죠.”박 대사와 김 전 사무차장은 비밀 연애를 시작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결혼했다. 박 대사의 첫 해외 부임지는 인도 뉴델리. 남편인 김 전 사무차장도 같은 지역에 부임했다. “당시 첫 부부 외교관이어서 외교부에서 배려해줬죠. 다만 부부가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저는 영사관, 남편은 대사관에서 일했습니다.”

박 대사는 인도에 이어 주유엔 대한민국대표부, 뉴욕총영사관, 중국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두 아들도 직접 키웠다. 김 전 사무차장은 2007년 반기문 사무총장 특별보좌관을 시작으로 10년간 유엔에서 근무했다. 결혼 후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부부가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만 절반이 넘는다는 게 박 대사의 설명이다.

오랜 외교관 생활 동안 힘든 적은 없었을까. 이 질문에 김 전 사무차장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전 3남 중 첫째로 태어났어요. 어렸을 때 모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셨죠. 공교롭게도 우리 부부는 아들만 둘을 낳았습니다. 이렇다보니 (박 대사는) 외교관 근무를 하면서도 집안의 남자 여섯 명을 사실상 혼자 책임졌죠. 그래서 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먼저 미안하고 잘못했다고 합니다.”

박 대사는 여성 외교관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상사들이 일 잘하는 여성 직원들에게 ‘웬만한 남성 직원보다 훨씬 낫다’는 칭찬을 많이 하죠. 전 이 말이 가장 듣기 싫었습니다. 일 잘하는 여성 직원이라면 ‘네가 부서에서 최고야’라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쿼터를 만들어놓고 여성끼리 경쟁하는 건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에요. 여성 후배들도 그 몫(쿼터)을 차지하려고 하기보다는 전문성을 갖춘 능력으로 남성 직원들을 이기는 것이 유리천장을 깰 수 있는 길입니다.”

“브렉시트는 한국에 새 기회 될 것”

메인 요리로 꼬리찜과 정갈한 백반 한 상이 차려져 나왔다. 꼬리찜 한 점을 입에 넣으니 쌉쌀한 한약 냄새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꼬리찜에 한약을 곁들인 한방 꼬리찜입니다. 한식이 건강한 음식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외국인들을 초대할 때마다 이 음식을 준비합니다.”

영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이미지는 어떨까. “예전에는 한국 하면 먼저 북한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면서 이미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특히 한식과 K팝 등 한류 붐이 영국에서 일고 있습니다. 영국 10~20대 사이에서 방탄소년단은 독보적인 인기를 얻고 있어요. 방탄소년단 덕분에 한국을 찾는 영국 젊은 층과 함께 이들과 동행하는 부모 세대도 늘고 있습니다.”

박 대사는 주영대사로 근무하면서 거둔 가장 뿌듯한 성과로 자동입국심사 도입을 꼽았다. 영국 히드로와 개트윅공항 등에선 지난해 5월부터 한국인을 대상으로 자동입국심사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대면 인터뷰와 입국 서류 작성 없이 여권 스캔, 안면 인식만으로 입국심사를 완료하는 제도다. 최대 1시간까지 걸렸던 입국심사는 제도 도입 후 10분으로 단축됐다. “이 제도가 적용되는 국가는 유럽연합(EU) 외 한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 싱가포르 7개국이 전부입니다. 영국 외교부를 수차례 쫓아다니며 설득했죠.”

영국은 지난달 31일 EU에서 공식 탈퇴했다. 박 대사는 “브렉시트는 한국에 새로운 기회”라고 강조했다. “영국은 산업 통상 서비스 등에서 EU 간섭 없이 정책의 자율성을 찾기 위해 브렉시트를 선택했습니다. 투자 유치를 위해 인센티브를 제시하고 규제를 완화하는 등 한국 기업들에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박 대사는 올해 대사관의 핵심 목표로 바이오·수소차·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분야의 한·영 협력 강화를 제시했다. “영국은 미국과 함께 4차 산업혁명 분야 원천기술을 많이 보유한 나라입니다. 의료 분야에서 영국은 다수의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죠. 한국은 임상시험 기술이 뛰어납니다. 양국 협력을 통해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대사관도 적극 지원할 계획입니다.”

■ 한·영 외교관계는…

영국은 1883년 한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일제강점기에 외교 관계가 단절됐다가 1949년 재수교했다. 영국은 북한과도 2000년 수교했다. 1999년 4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한·영 수교 116년 만에 국가원수로서 최초로 방한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인천국제공항에서 런던 히드로공항으로 가는 직항편을 매일 운항하고 있다.

주영 한국대사관은 런던 중심가인 버킹엄게이트에 자리잡고 있다. 런던 켄싱턴에 있는 주택(현 대사관저)을 대사관으로 활용하다가 1995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웨스트민스터궁(의회의사당)과 화이트홀(정부청사) 및 버킹엄궁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 박은하 주영국 대사 약력

△1962년 부산 출생
△1980년 혜화여고 졸업
△1984년 연세대 사학과 졸업
△1985년 외무고시 합격(19회)
△1985년 외교부 사무관
△1989년 미국 컬럼비아대 국제관계학 석사
△1989년 주인도 대사관 2등서기관
△1996년 주뉴욕 총영사관 영사
△2002년 외교부 지역협력과장
△2003년 주중국 대사관 참사관
△2006년 주유엔 대표부 공사참사관
△2011년 외교부 개발협력국장
△2014년 주중국 대사관 공사
△2017년 외교부 공공외교대사
△2018년 8월~ 주영국 대사관 대사
■ 朴 대사가 추천하는 영국 대표 음식

겉은 바삭 속은 촉촉 고기파이
익힌 채소·감자에 각종 고기 선데이로스트
茶와 케이크 곁들인 애프터눈티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한국인들에겐 음식이 맛없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대구 같은 흰살 생선을 튀겨 감자와 함께 곁들이는 피시앤드칩스 외에는 알려진 음식도 많지 않다.

박은하 주영국 대사는 영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고기파이를 추천했다. 고기파이는 바삭한 빵(푸딩) 껍질에 소고기와 양고기 등 다진 고기를 조리해 넣은 음식이다. 영국 선술집인 펍(pub)이나 가정에서 피시앤드칩스보다 더 즐겨 먹는 음식이기도 하다. 속은 촉촉하고 겉은 바삭해 맥주 안주로도 제격이다.

선데이로스트(사진)도 박 대사가 추천한 영국 대표음식이다. 각종 고기에 익힌 채소와 감자 등을 곁들인 이 음식은 일요일(선데이)과 로스트비프가 합쳐진 말이다. 영국인들이 19세기 교회에 다녀온 뒤 먹던 전형적인 일요일 식사 메뉴였다. 지금은 펍에서도 흔히 맛볼 수 있다. 고기 종류도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등으로 다양하다.오후에 차와 함께 스콘과 케이크 등 간단한 요기를 하는 애프터눈티도 추천할 만하다.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오후 시간에 맛볼 수 있다. 가격은 통상 런던 도심에서 2인 기준 최소 20파운드(약 3만6000원)를 넘는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