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의 베트남은 지금] '최고,최대,최다' 베트남의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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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베트남의 음력 설은 어느 해보다 희망으로 가득했다. 고급 과일 전문점은 미국산 체리 상자를 구입하려는 고급차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들은 차 트렁크에 선물을 가득 싣고 거래처와 관공서로 향했다. 어떤 가족은 고향 친지와 지인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8개 여행 가방에 싣고 가기도 했다. 얼굴을 반쯤 가린 마스크를 쓴 채 굳은 표정으로 일터로 향하던 스쿠터 위의 노동자들도 재운을 상징하는 금귤 나무를 소중히 안고,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자정을 넘겨 새해가 되자 하노이 도심 곳곳에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이날 저녁 무렵부터 세차게 내리던 강우와 천둥, 번개도 베트남의 새해 축제를 의식한 듯, 극적으로 멈췄다. 1986년 ‘도이모이’로 불린 개혁·개방 정책을 택한 이래 베트남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베트남 관영 매체들은 2019년을 결산하는 특집 기사를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그들의 기사 속에는 최고, 최대, 최초라는 단어들이 쏟아졌다. 잠정 수치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언론들은 베트남 통계청(GSO)의 예비 통계를 인용해 각 분야의 성과들을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다. GSO에 따르면 베트남은 2019년에 99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사상 최고치다. 2016년 16억 달러, 2017년 19억 달러, 2018년 68억 달러에서 단숨에 100억 달러 고지를 향해 비약한 셈이다.
수출입을 합한 교역액도 2019년에 5170억 달러로, 사상 처음 5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무역 활성화에 힘입어 베트남 중앙은행(SBV)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베트남의 외환보유고는 작년 말 기준 800억 달러에 달해 새로운 정점에 올랐다. 이 중 4분의 1이 2019년 한 해에 SBV에 입고됐다. 특히 민간 부문의 활력이 5~6년 전의 과거와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이다. 2019년 한 해에만 13만8100개의 기업이 신설돼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전년 대비 5.2% 증가한 수치다. 등록 자본금 역시 1730조동(약 751억달러)으로 사상 최고치를 달성했다. 전년보다 17.1% 증가했다. 기업당 평균 등록 자본금은 약 54만 달러로 추산됐다. 새로운 소규모 기업들의 출현은 가파른 폐업률 수치가 안겨 준 비관론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2019년 폐업을 준비 중인 기업은 4만3700개로 집계됐다.
2019년에 이룬 베트남의 놀라운 성취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베트남의 2019년 GDP 성장률은 7.02%를 기록했다. 2018년(7.08%)보다 다소 둔화되긴 했지만, 최근 10년래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월드뱅크(WB),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예상치를 훌쩍 넘었다는 점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외부 전문기관들은 베트남이 6%대 성장에 머물 것으로 예상했으며, 심지어 베트남 국회조차 2019년의 목표치를 6.6~6.8%로 잡았다.
베트남 정부는 2015년을 기점으로 지난 4~5년 간 거둔 성과에 고무돼 있었다. 한국, 중국에 이어 새로운 아시아의 용을 꿈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날개가 꺾였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상전벽해나 다름 없다. 급기야 2016년부터 베트남을 이끌어 온 응우옌 쑤언 푹 총리는 2045년 고소득 국가로의 진입을 선언했다. 베트남의 올해 1인당 GNI는 수정된 통계치를 적용해 약 3000달러에 불과하다.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 등과 함께 중하위 소득국가(1인당 GNI 1026~3995달러)로 분류돼 있다. 향후 20년 간 현재와 같은 6~7%대 성장률을 유지해 2045년께 고소득 국가(1인당 GNI 1만2376달러 이상)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베트남이 이룬 성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최고, 최대, 최다’라는 미사여구에만 현혹돼서는 안 된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해 베트남이 세계의 수출 기지로 부상하긴 했지만, 그 효과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푹 총리가 연 평균 성장률의 목표치를 6~7%로 잡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적어도 중국처럼 연 평균 9~10%대의 성장률을 달성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오히려 주목해 봐야할 점은 베트남 정부가 ‘통제 가능한 성장’을 달성하는데 성공하고 있다는데 있다. 환율, 물가, 인플레이션, 경제 성장률 등 각종 거시경제 지표들을 정부가 의도한 수준에서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지난 4년 간 얻은 최대의 성과다.
베트남 정부가 성장 속도를 의도적으로 조절하고 있느냐에 관해선 여전히 논쟁적인 요소들이 많다. 중국이 그랬듯이 베트남 역시 거의 무(無에) 가까운 상황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종착지에 다다르기 위한 경로조차 그리지 못한 채 플랫폼을 떠났다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덩샤오핑과 함께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끌었던 천윈은 이 모델을 새장 경제라고 불렀다. 시장 경제가 번창하도록 놔둘 만큼 충분히 유연하면서도 시장 경제가 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만큼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게 하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였다. 중국의 개혁에는 청사진이 따로 없었다. 천윈의 표현을 빌리자면 통제력을 잃지 않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전략이었다. 그들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넜다.
베트남의 조심성은 중국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공산당 1당이 통치하는 나라를 원했고, 시장경제는 이 같은 통치의 원리를 흔들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되길 바랬다. 그러나 시장경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미국의 경제제재가 지속되면서 계획경제와 배급제는 굶주림을 한계 지점으로 몰고 갔다. 1986년 도이모이가 도입됐을 무렵, 북한조차 합영법을 만들었다. 내수 시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인구 10억명의 중국과 1억명의 베트남은 차이가 있었다. 중국은 상하이 등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개혁 개방의 실험을 할 수 있었지만 베트남은 그렇지 못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려면 전면적으로 해야 했다. 베트남이 시장경제에 대해 가졌던 공포감은 덩샤오핑, 천윈 같은 중국의 지도부들보다 컸다. 베트남의 리더들은 1989년 중국 베이징 한복판에서 체제에 의문을 품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천안문 광장을 점거한 장면을 목도했다. 게다가 베트남은 중국과 달리 자본축적의 기반이 매우 빈약했다. 중국은 개방과 함께 전세계 화교자본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중국은 한때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했을 정도로 군수 산업을 통한 기초 체력을 갖추고 있었다. 베트남의 디아스포라도 모국의 개혁과 개방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중국에 비하면 규모가 미약했다.
180명의 공산당 중앙위원들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과 함께 남북으로 1600킬로미터에 달하는 베트남 전역을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건 아슬아슬한 곡예 운전이나 다름없다. 자본주의의 단맛을 이미 충분히 맛 본 사이공과 베트남 남부의 이탈을 막는 것도 중요했다. 도이모이를 표방한 건 1986년이었지만 그 후 20년 가까운 시간을 베트남 지도부는 지금껏 걸어보지 못했던 길을 더듬더듬 걷는데 주력했다. 그들은 2013년 헌법(2014년 1월1일 시행)을 제정할 때가 되서야 헌법에 시장경제라는 단어를 공식적으로 포함시켰다. 2013년 헌법 51조 1항은 베트남 경제를 이렇게 규정했다. ‘베트남 경제는 다양한 형태의 소유와 경제 부문으로 이뤄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시장경제(a socialist-oriented market economy) 다’ 1992년 4월에 제정, 실행된 헌법에서 베트남의 경제 시스템을 ‘상품 경제(commodity economy)’라고 표현한 이후 10년이 넘어서야 시장경제라는 표현이 나온 셈이다. 그 사이에 베트남은 1998년 파산 위기에 몰렸고, 비나신 사태로 집약되는 국영기업 중심의 경제 발전 전략 실패라는 최대 위기를 맞았다. 2008년 금융위기 때도 한국 등 외국인 투자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2016년 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베트남 지도부는 ‘무위(無爲)의 통치’를 하는데 주력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을 빼고는 거의 모든 정책의 방향이 통제, 관리, 조율에 맞춰져 있다. 새로운 정부 업무를 개시하면서 첫 일성으로 베트남 정부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의 상한선을 65%로 정했다. 이로 인해 호찌민 제2 국제공항 건설 등 대규모 토목 공사들은 줄줄이 중단됐다. 하노이와 호찌민은 자고나면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던 베이징, 상하이의 고성장기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현재 베트남의 경제 수준과 비슷했던 중국의 17~18년 전 베이징과 상하이 등 대도시는 상전벽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건설 ‘붐’을 경험했다.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한 건설업체 관계자는 “베트남에 있는 한국 건설사들은 지난 4~5년 간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라며 “빌딩이나 도로 건설은 베트남 토종 업체들과의 가격 경쟁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고, 교량 발전소 같은 대형 프로젝트들은 베트남 정부가 재정 부족으로 발주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통제 가능한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베트남 공산당이 2018년 국가 주석의 급작스러운 사망이라는 초유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정치적 안정을 확고히 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제정된 반부패법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란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이 정상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베트남 정부와 공산당이 부동산 개발 시장에 만연한 부패에 칼을 대기 시작하면서 하노이와 호찌민의 새로운 개발 프로젝트들은 거의 모두 중단됐다. 하노이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풍문마저 돌고 있다. 한국업체 관계자는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이 중심이 돼서 추진하고 있는 하노이 한인학교 건물 신축조차 하노이 시 정부가 인허가를 깐깐하게 진행하면서 일정보다 상당히 늦춰지고 있다”며 “삼성의 대형 R&D 센터 착공도 늦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는 새로운 베트남의 5년을 이끌180명의 공산당 중앙위원들을 뽑기 위한 선거가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내년 상반기 공산당 당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베트남의 ‘관리 모드’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향후 관전 포인트는 베트남 정부가 2021년 이후의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갈 지다. 한국과 중국의 선례를 좇아 고성장을 위한 정책을 택할 지, 아니면 말레이시아처럼 정치적 안정을 담보하면서 6~7%대의 중간 속도로 성장 패달을 밟을 지가 결정될 것이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베트남이 태국처럼 중진국이 함정에 빠질 위험에 대해 충분히 경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트남 재계 1위인 빈그룹이 자동차, 휴대폰, 가전 등 제조업에 ‘올인’하기로 하면서 유통 부문을 매각하고, 항공 분야 진출을 포기한 게 이 같은 의지의 방증이다. 베트남의 도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베트남 관영 매체들은 2019년을 결산하는 특집 기사를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그들의 기사 속에는 최고, 최대, 최초라는 단어들이 쏟아졌다. 잠정 수치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언론들은 베트남 통계청(GSO)의 예비 통계를 인용해 각 분야의 성과들을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다. GSO에 따르면 베트남은 2019년에 99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사상 최고치다. 2016년 16억 달러, 2017년 19억 달러, 2018년 68억 달러에서 단숨에 100억 달러 고지를 향해 비약한 셈이다.
수출입을 합한 교역액도 2019년에 5170억 달러로, 사상 처음 5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무역 활성화에 힘입어 베트남 중앙은행(SBV)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베트남의 외환보유고는 작년 말 기준 800억 달러에 달해 새로운 정점에 올랐다. 이 중 4분의 1이 2019년 한 해에 SBV에 입고됐다. 특히 민간 부문의 활력이 5~6년 전의 과거와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이다. 2019년 한 해에만 13만8100개의 기업이 신설돼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전년 대비 5.2% 증가한 수치다. 등록 자본금 역시 1730조동(약 751억달러)으로 사상 최고치를 달성했다. 전년보다 17.1% 증가했다. 기업당 평균 등록 자본금은 약 54만 달러로 추산됐다. 새로운 소규모 기업들의 출현은 가파른 폐업률 수치가 안겨 준 비관론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2019년 폐업을 준비 중인 기업은 4만3700개로 집계됐다.
2019년에 이룬 베트남의 놀라운 성취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베트남의 2019년 GDP 성장률은 7.02%를 기록했다. 2018년(7.08%)보다 다소 둔화되긴 했지만, 최근 10년래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월드뱅크(WB),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예상치를 훌쩍 넘었다는 점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외부 전문기관들은 베트남이 6%대 성장에 머물 것으로 예상했으며, 심지어 베트남 국회조차 2019년의 목표치를 6.6~6.8%로 잡았다.
베트남 정부는 2015년을 기점으로 지난 4~5년 간 거둔 성과에 고무돼 있었다. 한국, 중국에 이어 새로운 아시아의 용을 꿈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날개가 꺾였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상전벽해나 다름 없다. 급기야 2016년부터 베트남을 이끌어 온 응우옌 쑤언 푹 총리는 2045년 고소득 국가로의 진입을 선언했다. 베트남의 올해 1인당 GNI는 수정된 통계치를 적용해 약 3000달러에 불과하다.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 등과 함께 중하위 소득국가(1인당 GNI 1026~3995달러)로 분류돼 있다. 향후 20년 간 현재와 같은 6~7%대 성장률을 유지해 2045년께 고소득 국가(1인당 GNI 1만2376달러 이상)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베트남이 이룬 성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최고, 최대, 최다’라는 미사여구에만 현혹돼서는 안 된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해 베트남이 세계의 수출 기지로 부상하긴 했지만, 그 효과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푹 총리가 연 평균 성장률의 목표치를 6~7%로 잡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적어도 중국처럼 연 평균 9~10%대의 성장률을 달성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오히려 주목해 봐야할 점은 베트남 정부가 ‘통제 가능한 성장’을 달성하는데 성공하고 있다는데 있다. 환율, 물가, 인플레이션, 경제 성장률 등 각종 거시경제 지표들을 정부가 의도한 수준에서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지난 4년 간 얻은 최대의 성과다.
베트남 정부가 성장 속도를 의도적으로 조절하고 있느냐에 관해선 여전히 논쟁적인 요소들이 많다. 중국이 그랬듯이 베트남 역시 거의 무(無에) 가까운 상황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종착지에 다다르기 위한 경로조차 그리지 못한 채 플랫폼을 떠났다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덩샤오핑과 함께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끌었던 천윈은 이 모델을 새장 경제라고 불렀다. 시장 경제가 번창하도록 놔둘 만큼 충분히 유연하면서도 시장 경제가 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만큼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게 하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였다. 중국의 개혁에는 청사진이 따로 없었다. 천윈의 표현을 빌리자면 통제력을 잃지 않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전략이었다. 그들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넜다.
베트남의 조심성은 중국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공산당 1당이 통치하는 나라를 원했고, 시장경제는 이 같은 통치의 원리를 흔들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되길 바랬다. 그러나 시장경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미국의 경제제재가 지속되면서 계획경제와 배급제는 굶주림을 한계 지점으로 몰고 갔다. 1986년 도이모이가 도입됐을 무렵, 북한조차 합영법을 만들었다. 내수 시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인구 10억명의 중국과 1억명의 베트남은 차이가 있었다. 중국은 상하이 등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개혁 개방의 실험을 할 수 있었지만 베트남은 그렇지 못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려면 전면적으로 해야 했다. 베트남이 시장경제에 대해 가졌던 공포감은 덩샤오핑, 천윈 같은 중국의 지도부들보다 컸다. 베트남의 리더들은 1989년 중국 베이징 한복판에서 체제에 의문을 품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천안문 광장을 점거한 장면을 목도했다. 게다가 베트남은 중국과 달리 자본축적의 기반이 매우 빈약했다. 중국은 개방과 함께 전세계 화교자본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중국은 한때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했을 정도로 군수 산업을 통한 기초 체력을 갖추고 있었다. 베트남의 디아스포라도 모국의 개혁과 개방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중국에 비하면 규모가 미약했다.
180명의 공산당 중앙위원들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과 함께 남북으로 1600킬로미터에 달하는 베트남 전역을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건 아슬아슬한 곡예 운전이나 다름없다. 자본주의의 단맛을 이미 충분히 맛 본 사이공과 베트남 남부의 이탈을 막는 것도 중요했다. 도이모이를 표방한 건 1986년이었지만 그 후 20년 가까운 시간을 베트남 지도부는 지금껏 걸어보지 못했던 길을 더듬더듬 걷는데 주력했다. 그들은 2013년 헌법(2014년 1월1일 시행)을 제정할 때가 되서야 헌법에 시장경제라는 단어를 공식적으로 포함시켰다. 2013년 헌법 51조 1항은 베트남 경제를 이렇게 규정했다. ‘베트남 경제는 다양한 형태의 소유와 경제 부문으로 이뤄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시장경제(a socialist-oriented market economy) 다’ 1992년 4월에 제정, 실행된 헌법에서 베트남의 경제 시스템을 ‘상품 경제(commodity economy)’라고 표현한 이후 10년이 넘어서야 시장경제라는 표현이 나온 셈이다. 그 사이에 베트남은 1998년 파산 위기에 몰렸고, 비나신 사태로 집약되는 국영기업 중심의 경제 발전 전략 실패라는 최대 위기를 맞았다. 2008년 금융위기 때도 한국 등 외국인 투자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2016년 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베트남 지도부는 ‘무위(無爲)의 통치’를 하는데 주력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을 빼고는 거의 모든 정책의 방향이 통제, 관리, 조율에 맞춰져 있다. 새로운 정부 업무를 개시하면서 첫 일성으로 베트남 정부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의 상한선을 65%로 정했다. 이로 인해 호찌민 제2 국제공항 건설 등 대규모 토목 공사들은 줄줄이 중단됐다. 하노이와 호찌민은 자고나면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던 베이징, 상하이의 고성장기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현재 베트남의 경제 수준과 비슷했던 중국의 17~18년 전 베이징과 상하이 등 대도시는 상전벽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건설 ‘붐’을 경험했다.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한 건설업체 관계자는 “베트남에 있는 한국 건설사들은 지난 4~5년 간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라며 “빌딩이나 도로 건설은 베트남 토종 업체들과의 가격 경쟁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고, 교량 발전소 같은 대형 프로젝트들은 베트남 정부가 재정 부족으로 발주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통제 가능한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베트남 공산당이 2018년 국가 주석의 급작스러운 사망이라는 초유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정치적 안정을 확고히 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제정된 반부패법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란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이 정상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베트남 정부와 공산당이 부동산 개발 시장에 만연한 부패에 칼을 대기 시작하면서 하노이와 호찌민의 새로운 개발 프로젝트들은 거의 모두 중단됐다. 하노이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풍문마저 돌고 있다. 한국업체 관계자는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이 중심이 돼서 추진하고 있는 하노이 한인학교 건물 신축조차 하노이 시 정부가 인허가를 깐깐하게 진행하면서 일정보다 상당히 늦춰지고 있다”며 “삼성의 대형 R&D 센터 착공도 늦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는 새로운 베트남의 5년을 이끌180명의 공산당 중앙위원들을 뽑기 위한 선거가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내년 상반기 공산당 당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베트남의 ‘관리 모드’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향후 관전 포인트는 베트남 정부가 2021년 이후의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갈 지다. 한국과 중국의 선례를 좇아 고성장을 위한 정책을 택할 지, 아니면 말레이시아처럼 정치적 안정을 담보하면서 6~7%대의 중간 속도로 성장 패달을 밟을 지가 결정될 것이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베트남이 태국처럼 중진국이 함정에 빠질 위험에 대해 충분히 경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트남 재계 1위인 빈그룹이 자동차, 휴대폰, 가전 등 제조업에 ‘올인’하기로 하면서 유통 부문을 매각하고, 항공 분야 진출을 포기한 게 이 같은 의지의 방증이다. 베트남의 도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