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길 잃어버린 '확실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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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다 경제규모 12배 큰 美한 나라의 경제상황을 보여주는 지표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게 성장률과 실업률이다. 성장률은 한 해 동안 그 나라에서 산출된 부가가치(국내총생산·GDP)가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이 경제 대도약을 이룬 1966~1991년은 25년 동안 연평균 실질 성장률이 9.3%에 달했다. 7.5년마다 경제 규모가 두 배로 커졌다. 우리가 일군 고도성장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1953년 한 해 국민 한 사람의 소득을 지금은 열흘 안에 번다.” 실업률은 일할 능력과 의사가 있는 사람 가운데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의 비율이다. 탄탄한 성장을 해야 일거리가 늘어나고, 일자리도 생겨난다. 성장률과 실업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 나라의 경제 활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쌍둥이 지표다.
성장률 이어 실업률도 역전
민간기업 역동성과 활력의 차이
'관제 일자리' 고집하는 정부
어떤 길 가는 건지 돌아봐야
이학영 논설실장
그런 두 지표에서 한국이 미국에 모두 뒤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성장률이 2%를 기록했는데, 미국은 2.3%(OECD)~2.4%(IMF) 성장했을 것이라는 추정치가 나와 있다. 미국은 인구가 3억3000만 명을 넘고, 1인당 소득 6만3400달러(2018년)로 인구는 한국의 여섯 배 이상, 소득은 두 배에 가까운 나라다. 덩치가 클수록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어려운 건 당연하다. 그런데 미국은 2018년 성장률에서 2.9%로 이미 한국(2.7%)을 제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통화기금(IMF)의 추정대로라면 2년 연속 한국이 덩치가 12배 큰 미국에 성장률을 역전당한 것이다.우리나라가 본격 성장을 시작한 이후 미국에 성장률 앞 순위를 내준 건 2차 오일쇼크를 겪은 1980년과 외환위기 직격탄을 맞았던 1998년, 메르스 사태로 홍역을 치른 2015년 세 차례뿐이었다. 그런 큰 사건이 없었는데도 세계 최대 덩치의 미국에 2년 연속 성장률을 역전당한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성장률 자체도 2017년 3.2%, 2018년 2.7%, 지난해 2.0%로 가파르게 추락하고 있다.
실업률 지표의 역전 역시 심각하다. 한국 통계청과 미국 노동통계국(BLS)에 따르면 지난해 실업률이 한국은 3.8%, 미국은 3.7%였다. 0.1%포인트 차이에 불과해 보이지만, 그렇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노동시장 규모가 크고 직장인들의 이직(離職)이 잦아 한국에 비해 실업률이 높은 편이었다. 미국 경제학자들은 실업률이 4~5% 수준이면 이직 시 나타나는 마찰적 실업을 감안해 ‘완전 고용’으로 평가한다.
한국은 그 반대다. 취업자로 분류된 사람들의 일자리 가운데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게 많다. 지난해 취업자가 30만1000명 늘었다지만 신규 일자리의 상당수가 세금을 투입해 만든 노인 일자리거나 급여가 적은 초(超)단시간 일자리(1주일 17시간 이하 근무)였다. 근로시간이 1주일에 36시간 이상 되는 안정적인 취업자는 10만5000명 늘어나는 데 그친 반면, 초단시간 일자리가 30만1000개 증가했다. 무엇보다도 한창 가족을 부양해야 할 40대 취업자 감소 문제가 심각하다. 지난해 40대 일자리가 16만2000개나 사라졌다.성장률과 실업률 지표에서 우리나라가 미국과 비교해봐야 할 게 또 있다. 역동성과 활력의 차이다. 경제성숙도가 높고 덩치도 훨씬 큰 미국이 성장률과 실업률에서 한국을 앞선 건 민간 주도로 왕성한 창업과 기업 활동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는 덕분이다. GM 포드 등 전통 자동차 회사들이 주춤해지자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가 그 틈을 메우고, 한때 ‘혁신기업의 교과서’로 불렸던 GE가 쇠락한 대신 FAANG(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으로 불리는 더 혁신적인 기업들이 등장해 세계 시장을 주무르고 있다.
미국 정부는 민간의 그런 역동성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나라는 ‘관제(官製) 일자리’ 논란에서 보듯 정부 주도 색채가 짙어지고 있다. 억지로 성장률과 실업률을 포장하고선 대통령과 장관들 입에서는 “긍정적인 신호가 보이고 있다” “올해는 확실한 변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말이 쏟아진다. 더 이상 어떤 자극을 받아야 ‘신호’를 똑바로 읽고 ‘제대로 된 변화’에 눈을 돌릴 건지, 그런 날이 오기는 할지 억장이 무너진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