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논설실] "K팝처럼 되겠다"더니…투기판 전락한 'K헤지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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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이 성공한 것처럼 한국형 헤지펀드도 성공할 것이다."
2011년 'K헤지펀드'(한국형 헤지펀드) 도입을 밀어붙인 김석동 당시 금융위원장의 말이다. 헤지펀드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투기를 떠올리며 '시기상조 아니냐'고 우려하자 그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김 위원장은 자신이 분석한 K팝 성공비결도 제시했다. 바로 사람(인재)이었다. "장담하건대 헤지펀드에도 최고 금융인재들이 모일 것이다. 그들이 놀 수 있도록 규제를 풀겠다.” 하지만 출발은 초라했다. 2011년 12월 23일 첫 토종 헤지펀드 12개 동시 출시 당시 펀드설정액은 모두 합쳐 1500억원에 불과했다. 기대했던 5000억원에 크게 못미쳤다. 운용전략도 국내주식 등 로컬자산 중심의 ‘롱숏’이 거의 전부였다. 저평가 자산을 사고(롱·long) 고평가 자산은 공매도(숏·short)해 수익을 내는 가장 기본적인 수법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출발은 미미했지만 이후 무럭무럭 성장했다. 헤지펀드 시장은 최근 35조원 규모로 급성장했다. 당당한 금융시장 주역이 된 것이다. 특히 5조원 규모의 메자닌(채권과 주식의 중간 위험 단계에 있는 전환사채(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에 투자하는 것)시장을 만들어내다시피 했다. 이를 통해 중소기업 자금조달 역할도 톡특히 해냈다.
그렇게 김석동의 혜안은 빛을 발하는 듯했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게 세상 이치다. 작년 7월 '라임 사태'가 터지면서 K헤지펀드는 금융시장 불안을 부르는 그라운드 제로가 됐다. 국내 1위 헤지펀드사인 라임자산운용은 무리한 운용으로 부실이 커져 2조원 가까운 펀드투자금의 환매거부를 선언해 쇼크를 몰고 왔다. 최근에는 탄탄한 실적을 자랑하던 알펜루트자산운용도 3000억원 어치를 환매중단해 '펀드런' 사태를 우려하게 했다. '라임 사태'는 20여년전 글로벌 금융시장에 충격파를 던진 헤지펀드 LTCM 사태와 여러 면에서 닮았다.우선 혁신상품으로 시장을 선도한 점이 비슷하다. LTCM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설계한 금융공학 상품으로 센세이션을 몰고왔고 라임도 중소기업 메자닌펀드, 총수익스왑(TRS)을 활용한 해외채권펀드 등 혁신상품을 줄줄이 선보였다. 추락과정도 닮았다. LTCM은 1994년 출범 직후부터 블랙홀처럼 자금을 빨아들였다. 월가를 넘어 전세계 투자은행(IB)들이 돈을 갖다 맡겼다. 하지만 러시아 모라토리움(채무지급불능)이라는 '블랙스완'을 만나 일시에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2015년 업계에 등장한 라임도 독보적인 성장세로 단숨에 국내 1위 헤지펀드운용사에 올랐지만, 지난해 여름 부실운용이 알려지만서 한방에 나락으로 추락했다.
헤지펀드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은 몸집만 커졌을 뿐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한 한국 금융시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헤지펀드 운용회사들은 무모하고 위험한 베팅에 매달리며 금융시장 전체를 신뢰위기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대형 헤지펀드 펀드매니저 몇몇은 담합과 시세조종에 가까운 부적절한 행태를 지속하며 증시를 '돈놓고 돈먹는' 투기판으로 전락시켰다.
은행들은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안전하다”며 헤지펀드를 마구잡이로 팔아제꼈고, 증권사들은 비오는 데 우산뺏는 격으로 무차별로 자금을 회수하면서 펀드런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그 와중에 이번 사태의 주역인 이종필 라임자산운용 CIO(최고운용책임자)는 수백억원의 불법시세차익을 빼돌린 배임혐의가 포착됐다. 몰래 개인 사모펀드해 회사 고유계정과 펀드에서 보유한 우량자산을 싸게 편입하는 수법이 동원됐다는 의심을 받고있다. 사건이 터지면 자신의 부주의와 무책임에는 입을 닫고 피해자 코스프레에 열중하는 투자자들의 행태도 그대로다. 감(感)에 의존해 도대체 내 돈이 어디에 어떻게 투자되는지, 심지어 헤지펀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투자자도 부기기수다. 금융당국의 뒷북과 무능은 고질병이 되고 있다. 앞서 수차례의 경고음이 울렸건만 정부는 간파도 대처도 부실해 사태를 키웠다. 라임펀드가 의심스럽다는 제보가 1~2년전부터 이어졌고, 임직원 횡령, 환매 중단, 폰지사기 연루까지 폭탄이 연쇄적으로 터지는 동안 당국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 9년전 K-헤지펀드 출범 당시 국회 입법조사처가 “금융감독기관이 헤지펀드를 이해하고 건전성을 모니터링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먼저 시장에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우려한 게 현실로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이번 사태가 어떻게 비화할 지 아직 불투명하지만 희망을 놓을 필요는 없다.겪어야 할 과정이자 성장통이기도 하다. 미국 월가와 영국 시티도 헤지펀드 정착까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어떻게 하면 K헤지펀드가 위기를 딛고 K팝처럼 비상할 수 있을까. 김석동은 9년전 "K-팝의 성공은 어떤 한 가수가 잘하거나 시류를 잘 타서가 아니다. 최고 멤버들이 모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고의 작곡가, 가수, 엔터테이너, 조명기술자, 음향기술자, 홍보전문가 등 모든 방면의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이 K-팝이라는 설명이다. K헤지펀드 역시 한 사람의 스타·천재에 의존하거나 요행을 바라는 심리에서 탈피해야한다. 외형키우기에 매달리기보다, 상품개발·시장분석·세일즈·리스크관리 등 각 분야 최고수들이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시장환경 재설계가 시급하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2011년 'K헤지펀드'(한국형 헤지펀드) 도입을 밀어붙인 김석동 당시 금융위원장의 말이다. 헤지펀드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투기를 떠올리며 '시기상조 아니냐'고 우려하자 그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김 위원장은 자신이 분석한 K팝 성공비결도 제시했다. 바로 사람(인재)이었다. "장담하건대 헤지펀드에도 최고 금융인재들이 모일 것이다. 그들이 놀 수 있도록 규제를 풀겠다.” 하지만 출발은 초라했다. 2011년 12월 23일 첫 토종 헤지펀드 12개 동시 출시 당시 펀드설정액은 모두 합쳐 1500억원에 불과했다. 기대했던 5000억원에 크게 못미쳤다. 운용전략도 국내주식 등 로컬자산 중심의 ‘롱숏’이 거의 전부였다. 저평가 자산을 사고(롱·long) 고평가 자산은 공매도(숏·short)해 수익을 내는 가장 기본적인 수법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출발은 미미했지만 이후 무럭무럭 성장했다. 헤지펀드 시장은 최근 35조원 규모로 급성장했다. 당당한 금융시장 주역이 된 것이다. 특히 5조원 규모의 메자닌(채권과 주식의 중간 위험 단계에 있는 전환사채(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에 투자하는 것)시장을 만들어내다시피 했다. 이를 통해 중소기업 자금조달 역할도 톡특히 해냈다.
그렇게 김석동의 혜안은 빛을 발하는 듯했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게 세상 이치다. 작년 7월 '라임 사태'가 터지면서 K헤지펀드는 금융시장 불안을 부르는 그라운드 제로가 됐다. 국내 1위 헤지펀드사인 라임자산운용은 무리한 운용으로 부실이 커져 2조원 가까운 펀드투자금의 환매거부를 선언해 쇼크를 몰고 왔다. 최근에는 탄탄한 실적을 자랑하던 알펜루트자산운용도 3000억원 어치를 환매중단해 '펀드런' 사태를 우려하게 했다. '라임 사태'는 20여년전 글로벌 금융시장에 충격파를 던진 헤지펀드 LTCM 사태와 여러 면에서 닮았다.우선 혁신상품으로 시장을 선도한 점이 비슷하다. LTCM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설계한 금융공학 상품으로 센세이션을 몰고왔고 라임도 중소기업 메자닌펀드, 총수익스왑(TRS)을 활용한 해외채권펀드 등 혁신상품을 줄줄이 선보였다. 추락과정도 닮았다. LTCM은 1994년 출범 직후부터 블랙홀처럼 자금을 빨아들였다. 월가를 넘어 전세계 투자은행(IB)들이 돈을 갖다 맡겼다. 하지만 러시아 모라토리움(채무지급불능)이라는 '블랙스완'을 만나 일시에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2015년 업계에 등장한 라임도 독보적인 성장세로 단숨에 국내 1위 헤지펀드운용사에 올랐지만, 지난해 여름 부실운용이 알려지만서 한방에 나락으로 추락했다.
헤지펀드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은 몸집만 커졌을 뿐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한 한국 금융시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헤지펀드 운용회사들은 무모하고 위험한 베팅에 매달리며 금융시장 전체를 신뢰위기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대형 헤지펀드 펀드매니저 몇몇은 담합과 시세조종에 가까운 부적절한 행태를 지속하며 증시를 '돈놓고 돈먹는' 투기판으로 전락시켰다.
은행들은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안전하다”며 헤지펀드를 마구잡이로 팔아제꼈고, 증권사들은 비오는 데 우산뺏는 격으로 무차별로 자금을 회수하면서 펀드런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그 와중에 이번 사태의 주역인 이종필 라임자산운용 CIO(최고운용책임자)는 수백억원의 불법시세차익을 빼돌린 배임혐의가 포착됐다. 몰래 개인 사모펀드해 회사 고유계정과 펀드에서 보유한 우량자산을 싸게 편입하는 수법이 동원됐다는 의심을 받고있다. 사건이 터지면 자신의 부주의와 무책임에는 입을 닫고 피해자 코스프레에 열중하는 투자자들의 행태도 그대로다. 감(感)에 의존해 도대체 내 돈이 어디에 어떻게 투자되는지, 심지어 헤지펀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투자자도 부기기수다. 금융당국의 뒷북과 무능은 고질병이 되고 있다. 앞서 수차례의 경고음이 울렸건만 정부는 간파도 대처도 부실해 사태를 키웠다. 라임펀드가 의심스럽다는 제보가 1~2년전부터 이어졌고, 임직원 횡령, 환매 중단, 폰지사기 연루까지 폭탄이 연쇄적으로 터지는 동안 당국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 9년전 K-헤지펀드 출범 당시 국회 입법조사처가 “금융감독기관이 헤지펀드를 이해하고 건전성을 모니터링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먼저 시장에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우려한 게 현실로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이번 사태가 어떻게 비화할 지 아직 불투명하지만 희망을 놓을 필요는 없다.겪어야 할 과정이자 성장통이기도 하다. 미국 월가와 영국 시티도 헤지펀드 정착까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어떻게 하면 K헤지펀드가 위기를 딛고 K팝처럼 비상할 수 있을까. 김석동은 9년전 "K-팝의 성공은 어떤 한 가수가 잘하거나 시류를 잘 타서가 아니다. 최고 멤버들이 모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고의 작곡가, 가수, 엔터테이너, 조명기술자, 음향기술자, 홍보전문가 등 모든 방면의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이 K-팝이라는 설명이다. K헤지펀드 역시 한 사람의 스타·천재에 의존하거나 요행을 바라는 심리에서 탈피해야한다. 외형키우기에 매달리기보다, 상품개발·시장분석·세일즈·리스크관리 등 각 분야 최고수들이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시장환경 재설계가 시급하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