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의 컬처insight] 문화, 소비 시장의 새로운 주역 '업글 인간'

독서 모임 ‘트레바리’. /트레바리 제공
30대 여성 A씨의 1주일은 다양한 스케줄로 빼곡하게 차 있다. 평일 퇴근한 후엔 가까운 독립서점에서 하는 독서 모임에 참석하거나, 요가 강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요가를 배우러 간다. 주말이 되면 유튜브 영상 편집 공부를 한다. 보다 재밌는 유튜브 영상을 만들기 위해 영상 편집을 함께 공부하는 모임에도 나간다. 최근엔 서핑에 관심이 생겨 서핑 동호회도 가입할 예정이다.

누군가는 “일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20~30대 직장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일은 일대로 열심히 하지만, 그 이외의 시간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승진 등을 위해 근무 시간을 벗어나 일상을 희생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 ‘성공’보다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업글 인간’이라고 한다. ‘업그레이드(upgrade) 인간’의 줄임말로,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 교수가 <트렌드 코리아 2020>에서 올해의 트렌드를 이끌 키워드로 선정했다.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투자하고, 지갑을 여는 업글 인간. 이들의 움직임에 문화·소비 시장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업글 인간이 가장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자기 계발은 지적 활동이다. 어릴 때부터 취업하는 순간까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부를 해 왔던 것에서 벗어나 진정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더 알고자 한다. 이전엔 자신만을 위한 공부를 하기 힘들었다. 급속한 성장이 이뤄졌던 산업화 시대엔 그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이젠 사회적 환경이 변하고 있으며,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으로 일과 일상을 보다 균형있게 조정할 수 있게 됐다. 외롭고 힘들게 혼자 책을 뚫어져라 쳐다볼 필요도 없어졌다. 사람들 속에서 함께 웃고 즐기며 지식을 익힐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느슨한 연결 속에서 공부를 더 재밌게 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살롱’의 형태를 띤 각종 모임들이 생겨난 덕분이다. 업글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본 스타트업들이 그 판을 깔아주고 있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동일한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독서 모임 ‘트레바리’부터 경제, 경영 관련 해외 잡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코리아 포럼>를 읽는 모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코리아 포럼 ’ 등 까지 다양한 모임이 있다. 본업 이외에 부가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돕는 모임들도 생겨나고 있다. ‘딴짓클럽’에선 1인 크리에이터 도전, 독립출판 도전하기, 나만의 쇼핑몰 제작 등 다양한 ‘딴짓’을 할 수 있다. 살롱의 형태를 띤 모임의 참여 가격은 대부분 두세 달에 20만~35만원 정도 한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업글 인간들은 흔쾌히 지갑을 연다.

소비 시장에서도 업글 인간의 활동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요가 서핑과 같은 운동, 요리 등 취미 활동에 필요한 각종 장비와 옷을 선보이며 업글 인간을 위한 것이란 점을 대대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가구업체들은 ‘업글 인간을 위한 서재 가구’라는 문구로 자신만의 멋진 서재를 꾸밀 것을 제안한다. <트렌드 코리아 2020>에서 김난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성장은 현재지향적인 즐거움인 동시에 미래를 준비하는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오늘의 성장이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미래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자명하다.” 사실 업글 인간의 걸음이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다. 바쁜 일상에서 시간을 쪼개 작은 한걸음을 걷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걸음들이 쌓이면 분명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업글 인간들은 오늘도 걷는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