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캐피털에 외면 받는 글로벌 '큰손' 국민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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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VC들 대거 참여 거부글로벌 자본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의 벤처 출자 사업 인기가 시들해졌다. 국내 벤처캐피털(VC) 운용사들로부터 외면받으며 벤처 투자 일반부문 경쟁률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VC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한 상황에서 다른 출자자들에 비해 낮은 보수 등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는 국민연금으로부터 굳이 출자받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벤처펀드 위탁운용사 선정
일반부문 경쟁률 2대1 '저조'
인기 예전만 못한 국민연금
최대출자자 우대조치 요구 등
까다로운 출자 조건에 시큰둥
○벤처펀드 경쟁률 2 대 1 그쳐17일 벤처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선정이 마무리된 ‘2019년 국민연금기금 벤처펀드 위탁운용사 선정’ 일반부문의 경쟁률이 2 대 1을 기록했다. 일반부문은 펀드당 최대 600억원씩 두 곳을 선정하는데 단 네 곳만 경쟁에 참여했다. VC업계 관계자는 “통상 국민연금 벤처펀드 위탁운용사 입찰이 3 대 1 또는 4 대 1 정도의 경쟁률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2 대 1 수치는 역대 최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연금기금 벤처펀드는 출자 규모로는 국내 최대로 매년 VC업계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럼에도 이번 출자 사업에 다수의 명문 VC들은 신청하지 않았다.VC들이 국민연금 벤처 출자 사업을 외면하게 된 이유는 국민연금이 제시하는 까다로운 출자 조건 때문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오랜 기간 업계에서 논란이 돼온 최대출자자 우대 조치가 대표적인 예다. 최대출자자 우대 조치는 국민연금이 펀드의 최대출자자로 참여하게 될 경우 관리보수 등에서 국민연금에 대한 우대조치를 제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 유한책임출자자(LP)의 참여로 하나의 펀드가 만들어지지만 국민연금만이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을 최대출자자로 맞는 경우 운용사들은 펀드 결성을 위해 다른 출자자들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어왔다. 다른 출자자 가운데 한 곳이라도 우대조치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관리보수 전체를 국민연금 수준에 맞추는 상황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1000억원 이상 펀드의 경우 국민연금 출자분에 대한 관리보수가 펀드 설정액의 0.8%를 넘길 수 없다. 글로벌 평균 수준인 2%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적어도 1% 초·중반대 이상을 제시하는 국내 출자자 그룹과도 차이가 크다.
한 VC 임원은 “한번에 많은 돈을 펀딩할 수 있는 것은 매력적이지만 국민연금 돈을 받고 나서 다른 출자자들을 설득하는 고생이 너무 크다 보니 펀딩 계획에서 국민연금을 제외했다”며 “국민연금이 여전히 벤처투자시장의 큰손임은 분명하지만 출자자 군이 다양해지면서 연금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도 인기가 시들해진 요인”이라고 말했다.○정책 자금 대비 민간 참여 부족
대규모 정책 자금이 풀리고 있지만 여기에 매칭될 만한 민간 자금이 부족한 것도 국민연금 벤처펀드 출자 사업의 인기가 떨어진 요인이다. 그동안 주요 출자자 그룹이었던 은행 등 금융회사가 자체 VC를 설립하는 등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국민연금이나 한국벤처투자 등 정책 금융기관으로부터 펀딩에 성공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민간 부문 펀딩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 섣불리 대규모 펀딩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한 금융회사 최고투자책임자(CIO)는 “결국 민간 자본은 수익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회수 시장이 원활히 작동하지 않으면 뛰어들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어 “정부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만들기에 혈안이 되면서 정책 자금은 풀리고 있지만 민간 자본을 매칭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회사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인기가 시들해졌다는 것은 벤처투자가 그만큼 과잉된 상황이라는 방증일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