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남미 군부들 통신망까지 갖춰 잔혹행위…CIA가 다 봐"

WP, 암호장비회사 후속보도…칠레 등 '콘도르텔' 통신망 가동 반체제세력 탄압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970년대 말 남미 군사정권이 '콘도르 작전'으로 명명해 비밀통신망까지 갖추고 자행한 잔혹행위를 다 들여다봤다고 미 워싱턴포스트(WP)가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CIA가 스위스 암호장비회사 크립토AG의 실소유주로 고객 국가들의 기밀 통신을 훔쳐봤다는 엿새 전 탐사보도의 후속이다.

WP는 잔혹행위에 대한 첩보 입수와 이후 미국의 대응 사이에 놓인 법적·윤리적 문제들도 함께 제기했다.

WP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는 1970년대 말 콘도르 작전의 수행을 위해 '콘도르텔'이라는 이름의 비밀 통신망을 가동했다. 군사정권을 위협하는 세력 탄압을 위한 작전 수행 과정에서 정보를 공유한 것인데 이 콘도르 작전으로 반체제 인사가 비행기 밖으로 내던져지거나 셀 수 없는 이들이 실종되는 등 끔찍한 잔혹행위가 잇따랐다.

이 비밀통신망 가동에는 스위스의 암호장비회사 크립토AG의 장비가 이용됐다.

이 장비는 전 세계 120여개국에 판매돼 수십년간 사용됐는데 실소유주가 CIA라는 사실이 지난주 WP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남미 군사정권들은 애초 다국적으로 활동하는 반군 세력에 대한 정보 공유를 목적으로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남미 내 대량학살과 미·유럽에서 활동하는 망명인사 및 반군 지도자 암살까지 범위를 넓혀나갔다.
이 모든 잔혹행위를 위한 비밀통신을 CIA가 전부 들여다본 셈이다.

WP는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CIA 내부문건 등에 미 정보기관이나 고위 당국자들이 어떤 실질적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고 전했다. WP는 이어 "첩보활동의 궁극적 딜레마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소중한 정보의 원천을 위협할 수도 있는데 불법적이거나 폭력적 행위를 알리거나 개입할 의무가 있느냐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의 존 시프턴은 WP에 "잔혹행위를 알게 되는 건 심각한 케이스에서는 (대응해야 한다는) 법적 의무를 발생시키고 모든 케이스에서 도덕적 의무를 발생시킨다"면서 "국무부가 그동안 (남미에서 벌어진 잔혹행위 등에 대해) 모른 척하고 낸 성명을 살펴보면 흥미로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CIA 당국자는 "첩보는 통상적이지 않은 분야"라면서 "불가피하게 어떤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정보요원이) 세계의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주된 임무는 정보를 모으고 정책입안자들에게 건네 그들이 무엇을 할지 정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WP는 남미 군사정권이 자행한 잔혹행위 뿐만 아니라 9·11 테러 이후 체포된 알카에다 조직원에 대한 미국의 처우, 각지에서 미국이 무인기를 이용한 공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사살한 사례 등에서도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고 지적했다.

WP의 이날 보도에는 남미 군사정부 간 아귀다툼의 단면도 나타난다.

아르헨티나는 콘도르텔 운용 중 장비의 취약한 부분을 발견하고 스위스 크립토AG 본사에서 사람을 불러다 고친다.

그러고 나서는 같은 장비를 쓰는 다른 남미국가에는 언질을 주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놓는다.

그 취약한 부분을 이용해 다른 남미 국가의 기밀통신을 들여다보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CIA가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국의 손바닥 안에서 아웅다웅한 셈이다.

WP는 지난 11일 CIA가 서독 정보기관 BND와 함께 암호장비회사 크립토AG를 소유한 채 조작된 장비를 120여개국에 팔아 기밀을 입수해왔다고 폭로했다. '루비콘 작전'으로 명명된 이 작전에서 독일은 1990년대 초 손을 뗐으나 CIA는 2018년까지 작전을 계속했으며 한국도 1980년대 이 회사의 주요 고객이었다고 WP는 전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