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훈 회장 '수송보국' 100년…대한항공·한진해운 키워낸 리더십

조원태 회장 3세 경영으로 이어지는 '창업주 정신'

트럭 한 대로 한진상사 창업
항공사업은 경비행기로 시작

박정희 前 대통령 부탁 받고
적자 시달리던 국영항공사 인수
“교통과 수송은 인체의 혈관처럼 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간산업이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사진)는 일평생 ‘수송보국’을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국가의 동맥인 수송산업을 발전시켜 조국에 보답하겠다는 의미다. 당시 부실기업이던 대한항공과 한진해운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수한 것도 수송보국이라는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탄생 100주년을 맞은 조 창업주의 굳건한 신념은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의 취임으로 3세 경영의 막이 오른 지금도 한진그룹을 이끄는 핵심 철학이다. 조 회장은 지난 2일 대한항공 창립 51주년 기념사에서 “대한항공이라는 이름, 반세기 역사를 관통하는 수송보국이라는 가치 아래 하나된 우리”를 강조했다. 3대에 걸친 수송보국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대한항공은 창립 50년 만에 화물 기준 세계 5위, 여객 기준 세계 15위의 글로벌 항공사로 거듭났다.○트럭 한 대로 시작한 한진상사

1920년 2월 11일(음력) 조 창업주는 서울 미근동에서 4남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1930년대 대공황으로 부친이 운영하던 직물점이 부도가 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조 창업주는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경남 진해 해원양성소 기관과에 들어갔다. 기계에 대한 호기심 덕분에 우등 졸업한 조 창업주는 1942년 서울 효제동에 자동차 엔진 수리업체 이연공업사를 설립했다. 1943년 조선총독부가 모든 물자를 군수지원체제로 편입하면서 2년간 사업을 접었다.

1945년 해방을 맞자마자 조 창업주는 이연공업사 정리 보상금으로 인천 해안동에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트럭 한 대도 장만했다. ‘한진’은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뜻으로, 사업을 발전시켜 우리 민족을 잘살게 하겠다는 조 창업주의 신념을 반영했다. 한진상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인천항으로 몰려드는 운동화, 양복, 밀가루 등 생필품을 운송하며 성장했다. 국내 업체 중 최초로 미군 운송권도 따내면서 한진상사는 사업 시작 15년 만에 500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연 220만달러의 외화를 버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반대 무릅쓰고 하늘길 사업으로

조 창업주는 하늘로 눈을 돌렸다. 수송보국의 꿈을 하늘에서도 펼쳐보겠다는 의지에서다. 1960년 조 창업주는 4인승 세스나 경비행기 한 대로 항공여객사업을 시작했다. 주식회사한국항공 설립 신고도 냈다. 하지만 당시 정부가 국영기업인 대한국민항공사(KNA)를 키우기 위해 외화를 몰아주는 등 전폭적 지원에 나서자 조 창업주는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항공사업의 꿈을 놓지 않았다. 대진해운, 한국공항, 한일개발 등을 잇달아 설립해 사세를 키우고 자본금을 모았다. 그러다 1969년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 대한항공공사가 도산 위기에 처하자 조 창업주는 이를 인수하기로 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부채만 27억원에 달하는 부실기업이었다. 회사 중역들도 일제히 인수를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조 창업주는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이라며 과감히 인수를 결정하고 대한항공을 설립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조 창업주에게 “하늘 1번지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도 결심의 계기가 됐다. 구조조정을 통해 사업을 효율화하면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위기 때마다 ‘신용’ 강조해

고난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1973년 중동전 발발로 항공유 가격이 4배 이상 치솟았다. 연료 수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대한항공은 설립 4년 만에 새로 들여온 점보 비행기를 담보로 내놔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당장 5000만달러의 경영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조 창업주는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은행에 도움을 요청했다. 조 창업주 본인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로제 총재는 뜻밖에 흔쾌히 대출을 승인했다. 과거 업무를 같이 하면서 조 창업주의 신용에 확신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조 창업주는 입버릇처럼 ‘사업가의 기본 소양은 신용’이라고 강조했다. 한진상사 때부터 조 창업주는 빌린 자금의 상환기일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1956년 운전기사가 미군 겨울 파카 1300여 벌을 몰래 남대문시장에 팔아넘겼을 때도 조 창업주는 도난당한 물건을 모두 수거할 때까지 직원을 시장에 상주시켰다. 이를 계기로 미군의 신용을 얻어 베트남전 때 베트남 퀴논항의 1억5000만달러짜리 미 군수물품 운송권을 따내기도 했다.조 창업주는 인재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수송보국의 꿈을 완성하려면 교육 기회를 확대해 새로운 기업가를 키워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조 창업주는 1968년 인하학원, 1979년 한국항공대를 인수해 시설 확충 및 교육 향상을 위해 재정 지원을 했다. 1988년에는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직원들을 위해 한진산업대학(현 정석대학)을 개설했다. 2002년 타계 전까지 조 창업주는 생전 모은 재산 가운데 500억원을 수송·물류 연구발전, 학교법인 인하학원, 정석학원 등에 기부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