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우의 데스크 시각] 도돌이표 공포의 데자뷔

이관우 레저스포츠산업부장
“걱정하지 말라던 정부 말을 믿고 밀어붙인 건데….”

젓가락질 시늉을 하던 한 중소기업 대표 P씨가 말끝을 흐렸다. 달싹이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답답함과 부끄러움’. 상반된 감정의 격류는 어디에서 왔을까.그는 이벤트로 먹고사는 기획사 대표다.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광풍을 그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4월까지 크고 작은 행사 20여 개가 취소됐다. 연매출 절반이 날아갔다. 신제품 전시, 신입생 환영회 등 봄 행사 비중이 크다 보니 한 번의 충격이 치명타가 됐다. SNS 광고비, 인건비 등 이미 3억원을 밀어넣은 터였다.

“코로나19 경계 단계가 어느 날 갑자기 심각으로 올랐어요. 전시장 공사에 한창이던 때였는데, 하루만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예측 가능한 위기경보 절실‘갑-을-병’ 간 생존게임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행사를 취소한 그는 공사 철거비까지 책임질 처지가 됐다. 그가 받은 공적 정보는 심각 단계 발표 직후 지방자치단체가 보낸 ‘행사 자제 권고문’이 전부였다. 울화가 쉽게 가시지 않는 건 그래서다.

“위기 지표를 실시간으로 공유했으면 좋겠어요. 이럴 땐 며칠 몇 시부터는 공사고 뭐고 다 중단해라.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게요.”

시간과 공간을 파는 업종 특성상 ‘속도’가 생명이란 얘기다. ‘심각’이란 정성(定性)적 판단이 말처럼 쉬울까. 그가 말했다. “이를테면 건널목에서 파란불 남은 숫자를 표기하듯 하면 안 되나요? 주식시장도 과열되면 서킷브레이크란 걸 걸지 않습니까.” 파란불을 믿고 건너다 갑자기 빨간불로 바뀌는 낭패는 줄어들지 않겠느냐는 푸념이다.그의 마음을 후벼판 건 따로 있었다. 수십 년 쌓아온 관계의 파탄이다. “인건비라도 빼달라” “나도 받아야 줄 것 아니냐”는 말을 협력사와 주고받다 끝내 고성이 오갔다. “그렇게 믿는 청와대 게시판에 갑질 민원을 올리겠다”는 말이 뒤통수에 꽂혔다.

‘살고 보자’는 절박함 탓일까. 그 역시 자신의 ‘갑’에게 보상을 간청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갑’은 “우리도 매출이 반토막 나 죽을 지경”이라며 난색을 보였다. 자신이 ‘병’들에게 한 말의 판박이였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가해자는 뺑소니치고 없는데, 피해자끼리 드잡이를 한 격이다. 부끄러움이 싹튼 게 그때부터다.

사회적 면역 언제쯤 생길까그는 욕받이가 되더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냉정하게 보면 코로나19는 코로나19고, 약속은 지켜야죠. 저 같은 을이나 갑, 병 다요. 그러라고 계약서 쓰고 약관 만드는 건데. 그런 시스템이 잘 작동할 거라는 믿음이 있으면 막장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고요.”

잘못이 그에게만 있는 걸까. 따지고 보면 국가 위기 대응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 적이 우리에겐 많지 않다. 그 많은 위기와 상처를 겪고도 여전히 공적 면역 기제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그렇다.

오히려 더 깊은 불신과 혐오라는 사회적 병증에 빠져드는 듯한 게 요즘이다. 인터넷에선 ‘확진자=슈퍼전파자’란 편견이 독버섯처럼 피어오른다. 코로나19 예방에 필요하지도 않은 개인정보와 생활 동선이 넘쳐난다. 사방이 절벽인 산업 생태계는 이미 ‘퍼펙트 스톰’에 맞닥뜨린 형국이다. 그 와중에 정부는 화풀이하듯 제 발로 국경문을 닫아걸었다. 다가올 후폭풍은 고스란히 민초들의 몫이다.그러고 보면 다시 데자뷔다. 대재앙 때마다 피어나는, 이 쓰라린 경험을 다시 반복할 것 같은 도돌이표의 공포다.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