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장기집권 속 '책임' 사라진 日정치

김동욱 도쿄 특파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의 고도 성장기를 이끈 주역은 이전까지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연합국최고사령부(GHQ)가 전쟁 발발의 책임을 물어 기존의 옛 지도자층을 사회 전 영역에서 축출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요 조직에서 임원이 될 가능성이 없었던 보통의 사원들이 하루아침에 대거 중역이 됐다. 소위 ‘삼등중역(三等重役)’이라 불리며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됐던 인물들이었다.하지만 막상 이들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사회 전면으로 나서자 예상 밖의 빼어난 성과가 쏟아졌다. 1955년부터 1973년까지 19년 동안 일본의 연평균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9.3%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접한 휘발유 냄새에 반해 도쿄 유시마의 한 자동차 수리소에서 이력을 시작해 자동차 대기업 혼다를 일군 혼다 소이치로도 이 세대의 일원이었다.

日서 사라진 활기, 늘어난 눈치

하지만 새로운 인물들로 활력이 넘치던 일본 사회는 어느 땐가부터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고도 성장기를 ‘새 얼굴’들이 개척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잃어버린 20년’을 거치면서 일본 사회 각 분야는 ‘올드 보이’들의 장기 집권이 이어지고 있다. 1991년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의 뒤를 이어 야마구치현 중의원에 당선된 뒤 9선 의원이 된 역대 최장수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3선의 아소 다로 부총리, 8선의 고노 다로 방위상처럼 대를 이은 정치인들이 초장기간 권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특히 아베 총리가 2014년 총리관저 직할로 내각인사국을 발족해 간부급 공무원 600여 명의 인사권을 장악하면서 엘리트 공무원 조직의 자율성마저 사라져 일본 사회의 ‘정체’는 더욱 심화됐다. ‘손타쿠(忖度: 윗사람 마음을 헤아려 행동하는 것)’와 ‘덴노코에(天の聲: 절대 권력자의 지시)’라는 용어가 일본 사회에 횡행했다. ‘붉은 신호에 모두가 길을 건넌다면 (신호를 어겼다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일본식 집단주의·눈치 보기 성향만 강해졌다.

'요청' 정치에 매몰된 아베 총리

‘고인 물’의 폐단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장기 집권 세력의 권력이 비대해졌지만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지는 모습이 사라졌다. 아베 총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처와 관련해 발표했던 초·중·고 휴교와 주요 이벤트 자제(자숙), 한국과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제한은 모두 정부 조치가 아니라 관계기관과 해당자에 대한 ‘요청’ 형식으로 이뤄졌다. 정책의 책임을 지방자치단체와 학교, 관련 기관 등으로 떠넘기는 꼼수라는 게 일본 정치 전문가들의 분석이다.특히 일방적으로 갑작스럽게 취한 한국에 대한 입국제한 조치를 통해 장기간 축적된 일본 정치문화의 폐해를 집약적으로 볼 수 있다. 아베 총리는 후생노동성, 외무성 등 실무 부처의 의견을 무시하고 법적 근거도 약하고, 실효성도 의심받는 강공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 충분한 사전설명 없이 ‘충격요법’을 썼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매사에 ‘사전 정지작업(네마와시)’을 강조하는 일본 문화를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갑작스런 대규모 전염병 확산이 그동안 일본이 숨겨왔던 장기 집권의 병폐를 한 꺼풀씩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 모습이다.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