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리더의 지도력·고구려인 자유의지…안시성 '기적' 이끈 쌍두마차

(24) 2차 東亞국제대전 '高·唐전쟁'

주변국 무릎 꿇리는 唐
당나라의 해륙 양면작전
90일간의 안시성 공방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중국 랴오닝성 잉청쯔의 산성 내부. 둘레가 4㎞에 불과하다.
말을 타고 고구려 영토를 질주하면서 고구려인이 돼가던 나는 요동으로 건너가 안시성을 찾았다. 산 위로 올라가 점장대 자리에서 성안의 골짜기와 멀리 산들을 바라보던 중 두 단어가 떠올랐다. ‘기적’ 그리고 ‘자유의지(free will)’였다. 둘레 4㎞에 불과한 이 산성에서 당 태종이 지휘하는 최강의 10여만 대군을 패퇴시켰다니…. 고립무원의 상황 속에서 패배할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은 싸움인데도 항복을 거부한 그들, 90일간 극도의 공포를 이겨내고 격렬하게 전투를 벌인 고구려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이 지닌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수(高·隋) 전쟁에서 대패한 수나라는 곧 자체 분열됐다. 수를 대체한 당나라는 종주권 회복, 중화중심의 체제 완결이라는 중국적인 숙명도 계승했다. 대운하를 이용해 남북을 하나의 상권과 경제권으로 발전시켰다. 수도인 장안에는 페르시아인들,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망을 확장했고, 남쪽에서는 인도, 아라비아까지 해양 실크로드가 활성화됐다. 당 태종은 외교술로 북방 초원의 강국인 돌궐제국을 동서로 분열시켰고, 약화된 동돌궐을 복속시켰다(630년). 이어 서남쪽의 강국인 토번(티베트 지방)을 공격했고(639년), 문성공주를 시집보냈다.
다시 피어오른 동아시아 전운

서쪽에서는 비잔틴제국까지 이어진 무역망을 확보할 목적으로 고창국(신강성의 투루판 지역)을 멸망시켰다(640년). 중앙아시아의 강국(康國, 사마르칸트시)은 627년부터 조공사절을 보냈고, 바르후만왕은 ‘강거도독’이 됐다. 석국(타슈켄트) 안국(부하라) 등 소국들도 당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였다. 또 중간지역인 요서지역의 거란과 해(奚)를 복속시켜 고구려를 압박하게 했다. 놀랍게도 사할린의 ‘유귀’ 왕자가 세 번의 통역을 거쳐 당나라에 도착해 벼슬을 받았으며, 캄차카반도에 거주한 ‘야차’도 사신을 파견했다. 이처럼 유라시아 동쪽의 모든 나라와 종족들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당나라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 어쩌면 이렇게도 후진타오의 ‘역사공정’,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과 비슷한지 모르겠다.이 무렵 고구려, 백제, 신라는 어떤 상황을 맞이하며 어떤 정책을 취하고 있었을까? 고·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고구려는 대당(對唐)정책을 놓고 요하전선 중심의 적극적인 대결을 주장하는 연개소문 세력과 해양방어, 수성전을 선호하는 영류왕 세력으로 나뉘어 권력쟁탈전을 벌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당나라의 총체적인 전력을 분산시키는 외교군사전략을 입체적으로 추진해야 했다. 즉 서부전선인 당나라와는 화해를 취하면서 해양을 통한 기습 가능성에 대비하고, 북부전선인 돌궐과 거란을 우호세력으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다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몽골고원의 설연타와 교섭해 당나라의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남은 것은 남부에서 백제, 신라를 외교·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하면서 당과의 연결고리를 끊는 전략이었다.

백제는 고구려와 화해를 시사하면서도 전쟁 발발 전까지 당나라에 사신을 무려 열일곱 번 보냈다. 신라도 당나라에 사신은 물론 유학생과 승려들을 자주 보냈고, 643년에는 군사 파견까지 요청했다. 하지만 백제는 번국(藩國, 제후의 나라), 신라는 번신(藩臣, 왕실을 지키는 중신)일 뿐이었다. 당나라는 결국 신라를 고구려의 대항세력으로 선택했고, 전쟁이 벌어지자 신라는 3만 명을 파견해 고구려를 남쪽에서 협공했다.

당의 파상공격 이겨낸 안시성 전투이렇게 광범위한 전선이 형성된 가운데 벌어진 고·당 전쟁은 고·수 전쟁을 계승해 동아시아 종주권을 장악하고, 북방의 유목민족을 포위하는 대응전선을 구축하는 ‘제2차 동아시아 국제대전’이었다.

당나라는 선공을 하면서 해륙 양면작전을 개시했다. 645년 4월 육군은 요하를 건너 개모성(선양 외곽), 신성(무순 시내) 등을 점령하고, 별렀던 요동성을 공격했다. 수양제를 굴복시켰던 요동성은 주몽사당에 승리를 빌면서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바람을 이용한 화공에 버티지 못하고 15일 만에 함락됐다. 병사 중 1만 명이 전사하고 1만 명이 포로가 됐으며, 백성 4만 명이 당나라에 끌려갔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당했다. 이어 당 태종은 남쪽으로 이동해 백암성에서 항복을 받았고, 안시성을 공격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와 말갈 혼성군인 15만 명을 파견했으나 주필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3만6800명이 포로로 잡히고 말갈병 3300명은 생매장당했다. 당나라는 말 5만 필, 소 5만 마리, 금빛 나는 갑옷인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했다.

안시성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90일 동안 공방전을 벌였다. 당나라군은 사정거리 1000m의 기계식 활인 교차노(絞車弩), 이동식 투석기인 포차, 근거리 중형무기인 박간 등으로 성벽을 무너뜨리려 했다. 고구려는 그 위에 토담과 목책을 세워 저항했다. 하루에도 6~7회의 공방전을 벌이는 전투가 계속됐다. 그러자 당나라의 일부 신하들은 이틀 거리인 비사성에 주둔한 장량의 수군을 전투에 참여시키자고 주장했다.
요동반도 남쪽 장하현에 있는 석성(石城)의 동쪽벽. 647년 전투 때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인 연개수영이 이 성에서 지휘했다.
당시 당나라의 수군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당 태종은 해양능력을 바탕으로 대규모의 병사와 군수물자를 요동반도의 남부해안과 한반도의 서해안 지역에 상륙시키는 작전을 추진했다. 644년 7월에 강주와 홍주(강서성 일대) 등에서 전선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운반했다. 큰 전선(戰船)들은 800명의 병사를 수용했고, 일반 누선(樓船)도 200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 1차 전투에 패배한 뒤인 648년 7월에도 양쯔강 상류(쓰촨)에서 전선들을 건조하고, 8월에는 홍주 등에서 1100척을 건조하게 했다.645년 수군 장군인 장량은 평양성 직접공격을 계획했다. 4만 명의 병력(《당회요》에는 7만 명)과 500여 척의 선박으로 산둥반도의 동래항(현재 펑라이시)을 발진했다. 묘도군도를 따라 요동반도 남단이자, 발해와 서해를 연결하는 해상관문이며, 내륙 진출의 거점인 비사성(지금의 다롄시 금주) 앞에 상륙했다. 해군사령부였던 비사성은 음력 5월, 서문으로 야간급습을 받아 8000명이 전사하면서 함락당했다. 승리한 장량은 일부 함대를 압록강 하구로 파견했으나 자신은 안시성으로 갈 수 없었다. 고구려가 요동반도 남쪽 해안과 섬들에 구축한 성들과 수군의 저항 때문이다.

고구려인 자유의지가 창조한 기적

당나라는 60일 동안 무려 50만 명을 동원해 안시성 동남쪽에 토산을 쌓아 공격하려 했다. 그런데 토산은 완성 직전에 무너졌고, 고구려군은 재빨리 점령해버렸다. 장기전이 되면서 음력 9월이 되자 추위와 군수품 보급 문제로 당군은 황급하게 철수했다. 이때 태종은 성주가 쏜 화살에 눈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이색의 《정관음》). 당군은 한겨울의 요택(뻘)지역에 빠져 처절한 상황에 처했고, 말은 십중팔구 얼어 죽었다(《자치통감》). 태자가 보낸 결사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태종은 고구려 공격을 만류했던 위징을 부르면서 통곡했다. 하지만 초원의 튀르크계인 설연타를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고, 다시 647년과 648년에 대규모 수군으로 요동반도 해안과 압록강 하구를 공격했다. 그리고 649년에 정체불명의 병으로 죽었다(윤명철, 《고구려 해양사연구》).

안시성의 승리는 국가시스템, 기술력, 경제력 그리고 성주 양만춘의 지도력과 고구려인의 자유의지가 창조한 ‘기적’이었다. 그런데 중국 사료와 당 태종을 칭송한 《삼국사기》는 이름 없이 그저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했다. 괴이한 역사기록과 사람들이다. 그나마 먼 훗날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양만춘(梁萬春)이라는 이름을 찾아주었다(《동국통감》에선 ‘楊萬春’).

‘요동은 과거에 중국 땅이었다(遼東故中國地).’ 당 태종이 전쟁 직전에 내린 조서에 실린 내용이다. “한국은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 도널드 트럼프가 공개한 시진핑의 말이다. “높은 산봉우리가 주변의 많은 산봉우리와 어울리면서 더 높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대통령이 2017년 12월 15일 중국 베이징대 강연에서 한 말이다.개인의 ‘자유의지’가 소중한가? 개인들이 모인 민족의 ‘자유의지’는 더더욱 소중하다. 안시성의 병사와 백성들을 떠올리며 지금 우리 민족이 갈 길을 생각해본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