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위기 심화 땐 '외환 곳간' 순식간에 바닥"

전문가들의 외환보유액 진단

1차 방어선 뚫리면 유출 가속화
당분간 방어적으로 운용 바람직
코로나19 충격으로 국내 증시가 폭락하고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자 한국 외환보유액이 적정한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과거 위기 상황과 비교하면 상당한 방어력을 갖췄다”면서도 “위기가 증폭되면 마냥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고 보고 있다.

16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말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019억7000만달러로 세계 9위 수준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의 2005억달러에 비하면 두 배가량 많다. 여기에 통화 스와프를 통해 별도의 외환 안전판도 구축했다. 캐나다 중국 등 7개 나라와 스와프 계약을 맺고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한·중·일 3개국’의 다자 간 통화 스와프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M)’에도 참여하고 있다.금융위기 당시 기획재정부 국제금융담당차관보로 ‘외환시장 방어’를 총괄했던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사진)은 “늘어난 외환보유액과 전체 스와프 한도(한도 무제한인 캐나다를 제외하고 1328억달러) 등을 감안하면 웬만한 대외 충격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며 “하지만 글로벌 위기 수준의 충격이 닥치면 안심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신 전 위원장은 “2008년 4월 당시 외환보유액이 2600억달러가량 비축돼 있어 ‘문제없다’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실제로 위기가 가중되고 달러를 풀기 시작하자 6개월 만에 2005억달러까지 줄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자 글로벌 시장에서 2000억달러가 붕괴되면 한국이 위험해진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며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2000억달러가 심리적 지지선이 돼버린 것”이라고 회고했다.

신 전 위원장은 “만약 위기가 가중돼 2000억달러 선이 무너졌더라면 유출이 상당히 가속화됐을 것”이라며 “일단 지지선이 깨지면 우리가 안심하다고 생각하는 수준도 속절없이 깨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신 전 위원장은 “무리하게 환율을 끌어내리려다가 외환보유액이 급감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시장에서 신인도가 떨어지고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며 “당분간은 방어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맞다”고 조언했다.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도 “위기 때는 심리적인 쏠림 현상이 강한 만큼 한 번 외환이 빠져나가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며 “외부 충격을 막기에 충분한 수준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 신용등급이나 정부 재무건전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