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가상화폐·사라진 죄의식…性범죄도 게임처럼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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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넷서 n번방까지…부끄러운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회원 100만 명의 음란물 사이트 ‘소라넷’, 세계 최대 규모의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미성년 성착취물을 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 세계 최대 규모의 한국 아이돌 딥페이크 음란물 제작 사이트…. 한국인이 주도한 디지털 성범죄 사례들이다. 이 같은 디지털 성범죄는 법과 제도가 미흡한 틈을 타 교묘해지고 악랄해졌다. 갈수록 발전하는 정보기술(IT)을 악용해 지금 이 순간에도 사이버 공간에서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다.
IT 발달만큼 악랄해진 범죄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
성범죄 온상으로 변한 IT 인프라IT 발전 속도만큼 디지털 성범죄도 진화해왔다. 1999년 개설된 소라넷은 김대중 정부 시절 구축한 초고속 인터넷망이 바탕이 됐다. 인터넷 사용 인구가 급증하면서 100만 명에 달하는 회원을 확보했다. 정부가 2006년 접속을 차단했지만 소라넷은 인터넷 주소를 계속 바꿔가면서 확장했다. 2015년이 돼서야 당국의 수사망에 걸려 폐쇄됐다.
‘소라넷의 후예’들은 잇따라 나왔다. 회원 수 120만 명의 ‘AV스눕(AVSNOOP)’이 대표적이다. 여기서도 불법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유포했다. 운영자는 2017년 경찰에 잡혔다.소라넷 후예들에게 스마트폰의 등장은 또 다른 기회였다. 데이터 전송 속도가 빨라지면서 불법 동영상을 유통하기 수월해졌다. 보안성이 높은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 덕에 사법당국의 감시도 피할 수 있었다. 지난해 4월 세계 최초로 5세대(5G) 이동통신 서비스가 상용화되는 등 한국의 모바일 인터넷 환경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n번방이 생긴 배경이다.
웰컴투비디오도 첨단 IT를 적극 활용한 범죄다. 경찰이 수사하기 힘든 일명 ‘다크웹’에서 범죄를 저질렀다. 다크웹은 일반적인 인터넷 브라우저로는 접속할 수 없는 암호화된 인터넷망이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 검사 출신인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IT의 발달이 문제가 아니라 그 부작용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것이 디지털 범죄의 핵심”이라며 “그것을 악용한 범죄자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옅어진 죄의식인터넷 보급으로 각종 정보 유통량은 급증했다. 미성년자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음란물이 쏟아졌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2018년 내놓은 ‘2017년 인터넷 불법·유해정보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0대 중 27%가 모바일 기기로 불법·유해 사이트에 접속한 경험이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자들의 경우 대부분 수사 과정에서 대량의 불법 음란물을 소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음란물을 접한 경험이 ‘나쁜 상상력’으로 이어져 범죄 행위로 나타났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박종익 강원대 의학과 교수는 “n번방에 가담한 청소년들의 경우 죄의식이 너무 박약해 큰 충격을 받았다”며 “도덕성에 대한 가정과 학교의 교육 강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PC 화면 등으로 범죄를 접하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무뎌지기 쉽다는 분석이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미 찍힌 영상을 본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 때문에 이런 범죄가 쉽게 확산된다”고 우려했다. 딥페이크 음란물 제작의 경우에도 같은 원본 동영상에 여러 명의 얼굴을 계속 바꿔치기하는 것이 하나의 놀이처럼 여겨지고 있다.
‘제2의 n번방’ 계속 나올 수도‘돈이 된다’는 것도 디지털 성범죄 증가의 주요 원인이다. 소라넷은 수백억원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IT의 또 다른 산물인 가상화폐와 결합되면서 디지털 성범죄가 하나의 산업처럼 커지고 있다. 가상화폐는 이체 내역 등 추적이 어렵다는 점을 악용했다. 웰컴투비디오 사이트 운영자 손모씨는 음란물 22만여 건을 유통하면서 415비트코인(약 31억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n번방 사건의 주범인 조주빈 씨도 가상화폐로 수익을 올렸다.
솜방망이 처벌이 ‘제2의 소라넷’을 낳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씨는 지난해 5월 2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다음달에 출소한다. 미국에서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하면 초범이라도 징역 15~30년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소지만 해도 최대 10년 이하의 징역형 선고가 가능하다. 유승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사무국장은 “불법 동영상 시청 정도는 성폭력이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이 이어지면 n번방 사건은 반복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주완/김남영/노유정 기자 kjwan@hankyung.com